•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1. 일제의 종교정책
  • 3) 문화정치기의 종교 회유·분열정책

3) 문화정치기의 종교 회유·분열정책

 3·1운동에서 한국인들의 거족적인 저항에 부딪힌 일제는 무단통치만으로는 계속적인 식민지배가 어렵다고 보고, 1919년 8월 총독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로 교체하여 정책의 변화를 꾀하였다. 사이토 총독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시정개선을 약속하고 저항세력에 대한 회유와 분열정책으로써 이른바 분할통치라고 하는 보다 지능적인 식민지배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는 우선 조선총독부 사무분장 규정을 개정하여 학무국에 종교과를 신설하여 그 동안 내무부 제1과에서 다른 업무와 함께 담당하던<神社 및 寺院에 관한 사항>과<宗敎 및 享祀에 관한 사항>을 분리하여 전담하게 하였다.233)≪朝鮮總督府官報≫, 1919년 8월 20일, 號外<조선총독부훈령 제30호>. 그리고 3·1운동의 탄압으로 악화된 국제적인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하여 정치선전을 강화하고 선교사들을 회유하였다.234)강동진,≪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0), 17∼114쪽. 그리하여 그 동안 선교사들의 불평을 샀던,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 교수와 종교행사를 할 수 없게 규정한 1915년<개정사립학교 규칙>을 폐지하고, 다시 개정하여 종교교육에 대한 규제를 없앴다.235)≪朝鮮總督府官報≫, 1920년 3월 1일,<조선총독부령 제21호>. 이어서 1920년 4월<포교규칙>을 개정하여 교회당·포교소 등을 설치할 때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던 것을 신고만 하도록 하였으며, 위반하였을 때 벌금형에 처한다는 규정을 삭제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개정된<포교규칙>제12조에 “조선총독은 현재 종교에서 사용하는 교회당, 설교소 또는 강의소 등에서 안녕 질서를 문란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그 설립자 또는 관리자에 대하여 이의 사용을 정지 또는 금지할 수 있다”는236)≪朝鮮總督府官報≫, 1920년 4월 7일,<조선총독부령 제59호>. 새로운 규정을 두어 총독이 직접 종교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총독부는<사찰령>을 통하여 거의 완벽한 통제가 가능했던 불교계에 대해서도 일부 각성한 젊은 승려들의<사찰령>폐지 요구를 묵살하고, 다른 종교계와 마찬가지로 회유·분열정책을 썼다. 승려 2,300여 명이 날인한<사찰령>폐지 진정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으나, 이에 대한 찬부를 둘러싼 30본산의 분열을 이용하여, 총독부는<사찰령>을 더욱 철저히 고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1922년 12월 친일적인 성향을 띤 교무원을 재단법인으로 인가해 줌으로써 불교계의 중앙집권화를 통한 통제를 꾀하였다. 이러한 총독부의 중앙집권화, 친일화 의도는 1920년에 만들어진 다음과 같은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이라는 문서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①<사찰령>을 고쳐 경성에 전국 30본산을 통할하는 총본산을 세우고 중앙집권화를 꾀한다.

② 총본산의 관장에는 친일주의자를 세운다.

③ 불교진흥촉진단체를 만들어 총본산의 옹호기관 노릇을 하게 한다.

④ 진흥촉진단체 본부를 경성에 두고 회장을 居士 중 친일주의자 가운데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채운다.

⑤ 이 단체의 사업을 일반 인민의 교화, 죄인의 감화, 자선사업 기타로 한다.

⑥ 총본산·각 본산·불교단체에 상담역으로 인격있는 내지인(일본인)을 둔다.(≪齋藤實文書≫제9권, 고려서림, 1990, 영인본, 143∼151쪽;김순석,<192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13, 독립운동사연구소, 1999, 79쪽).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정책에 따른 교무원이 얼마나 총독부와 유착되어 있었던가는 1923년 30본산 주지회의를 총독부 학무국에서 열고, 총독부 정무총감과 학무국장의 훈시를 듣게 되어 있어 불교계 청년들의 비판을 받았던 데서도 확인된다.237)≪동아일보≫, 1923년 1월 18일,<총독부에 주지회의>.
김광식,≪한국근대 불교사연구≫(민족사, 1996), 227쪽.
총독부는 1929년 6월에도<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을 개악하여 사찰이 돈을 빌릴 때 담보를 제공하는 경우에도 총독의 허가를 얻도록 하여 주지가 임의로 재산을 담보하지 못하게 하였다.238)朝鮮總督府,≪施政25年史≫(1935), 588쪽.

 총독부는 3·1운동 이후 유교계에도 대동사문회·유도진흥회 등 친일단체를 만들어 친일여론을 조성하고, 이런 단체에 가입한 유생들을 중추원 참의로 임명하였다. 특히 1920년 1월에 조직된 유도진흥회는 설립 당초부터 총독부 내무국이 깊이 개입하여, 이를 이용해 상해임시정부의 내부분열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 회는 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각도에 지부가 결성되고 도지사, 군수 등 지방관들과 유착하여 향교조직을 통해 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하게 하였다. 이 단체는 설립목적을 “유도를 진흥해서 퇴폐된 유풍을 되살리고, 동양도덕의 진원을 발휘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 국가 진보의 기운에 바친다”고 하여 노골적으로 총독부 통치정책에 협력을 표방하였으며, 실천사항으로 봉건적·복고주의적 예교의 부활·장려를 강조하였다.239)강동진, 앞의 책, 226∼229쪽. 그러나 이러한 노골적인 친일 표방은 오히려 의식있는 유생들의 반감을 사 총독부가 기대했던 효과는 거둘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총독부는 1920년 6월<향교재산관리규정>을 개정하여 종래 향교의 재산수입을 관공립보통학교 경비에 충당하던 것을 중단하고 문묘 享祀비용과 지방교화사업 지원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의 사용에 관해서는 지방관들이 철저히 감독하게 함으로써 지방관들은 이러한 향교의 재산을 유생들의 회유와 친일유림단체를 조성하여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데 사용하였다. 더욱이 1923년 4월에는<지방문묘직원에 관한 건>을 발포하여 향교직원의 임면에 유림이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 지방관청에서 관장하도록 하여 철저히 친일 분자들로 이들을 임명하였다.240)이명화, 앞의 글, 107∼109쪽. 그리하여 이를 통해 유생들을 회유하고, 이른바 교화사업이라 하여 연설회·강연회·백일장 등에 향교의 재산을 낭비하였다. 더욱이 1929년 6월에는<서당규칙>을 개정하여 서당에 대한 지도·감독을 강화하였다. 즉 서당의 명칭, 아동 정수, 교수용 도서 등을 종래에는 부윤·군수에게 신고만하면 되던 것을 도지사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서당에서 일본어·조선어·산술을 가르칠 때는 총독부에서 편찬한 도서를 사용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당의 지도·감독에 대한 훈령을 내려 서당의 인가를 더욱 엄격하게 하고, “적당한 방법에 의하여 국민도덕에 관한 사항을 교수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241)朝鮮總督府, 앞의 책, 586∼587쪽.

 1920년 9월≪동아일보≫가 일본 신도의 3종 신기 숭배를 미신적 우상숭배라고 비판하는 사설을 썼다가 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신도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문화정치기에도 전혀 바뀌지 않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총독부는 1925년 조선신궁의 준공을 앞두고 있어, 이 기회를 통해서 신사참배와 신사신앙의 확산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정책은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1924년 5월 兼二浦神社 낙성식에 일반인들로부터 봉축비 명목으로 기부금을 거두고, 그 지역 학생들을 참배시킨 것에 대해서≪동아일보≫가 “맘에 없는 기부, 뜻에 없는 참배”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 총독부 학무국장이 각 도지사에게<神宮大麻及曆頒布에 關한 件>이라는 통첩을 보내 이의 보급을 장려한 것이라든지, 같은 시기에 발생한 강경보통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에 대한 학무국장의 통첩을 보아도 신사신도를 초종교적인 위치에 두고 이에 대한 숭경과 참배를 장려하려는 그들의 정책에는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1925년 10월 조선신궁의 진좌제를 앞두고 이를 공공기관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학무국장이 그해 ‘생도 아동의 신사참배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내어 학생들의 동원과 참배를 유도하던 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의 불참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이에 총독부는 이를 강요하면 조선인의 반감만 더 사게 될 것이며, “신사를 통해 사상선도를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내부 의견도 있어 적극적인 신사정책을 일시 후퇴하였다. 그리하여 보다 적극적인 강경책을 쓰고, 정책적인 지원을 원하던 신직들의 불평을 사기도 했다.242)김승태,<일본신도의 침투와 1910·1920년대의 ‘신사문제’>(≪한국사론≫16, 서울대 국사학과, 1987) 참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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