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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회변혁론의 모색과 천도교의 분열

 천도교총부에서 문화운동론을 수용하고 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중앙총부의 대종사장으로 손병희의 사위였던 鄭廣朝는 천도교의 공로자를 소원하게 다루고 靑年會員과 일본 유학생들을 중용하였다. 그리고 誠米收入의 감소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광조는 1921년 4·5월경 천도교청년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277)조규태, 앞의 책.

 정광조의 이러한 정책으로 피해를 보았던 세력은 吳知泳 등의 朴寅浩派와 金尙黙·尹益善·朴魯學 등의 洪秉箕派였다. 이들은 삼남 출신의 동학도로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하여 소위 반봉건·반외세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구세력이었다. 오지영 등의 박인호파와, 김상묵·윤익선 등의 홍병기파는 2세교주의 아들인 崔東曦派와 결합하고 동학의 이념을 고수하려는 의도에서 동학계 유사종교의 통합을 추진하여, 5월 13일 侍天·濟愚·靑林·敬天·濟世敎 등 최제우의 遺敎를 받드는 동학계 유사종교의 대표자 26명과 함께 東學俱樂部를 발기하였다.

 또 한편으로 오지영과 홍병기·윤익선·김상묵·최동희 등은 1921년 4월 무렵 지방의 교인들을 끌어들여 교회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임명제인 의사원제를 선출제인 의정원제로 바꾸고 의정원을 이용하여, 교헌을 변경하였다. 이들은 大道主를 公選하고, 중앙과 지방의 차별을 완화하며, 일체의 연원은 용담연원, 즉 최제우에 귀속시켜 전도자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독자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게 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운영에 반대하고, 연합제로 교회를 평등하게 운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광조 등은 손병희의 힘을 업고 서북지역의 원로들을 회유하여 반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혁신파는 1922년 8월 말 天道敎革新團을 결성하고, 신·구의 분리를 발표함과 함께<임시약법>9조를 공포하였다. 그리고 1922년 10월경 天道敎維新靑年會를 통하여 지방의 천도교도를 회유하고,<天道敎約法>을 가결하고, 1922년 12월 기존의 천도교총부에서 이탈하여 별도로 天道敎聯合敎會를 조직하였다.278)<天道敎의 內訌에 關한 件(1922. 3. 16)>( 高麗書林 影印,≪日帝下社會運動史資料叢書≫4, 1992), 53쪽.

 천도교연합회원들은 천도교의 이념을 사회주의적으로 해석하여<約法>에서 교회의 중앙집권적 운영을 반대하고 연합적 운영을 주장하였으며, ‘공약삼장’에서는 “階級的 差別制는 타파하고 평등생활을 領導할 事”를 강조하였다.279)吳知泳,≪東學史≫(大光文化社, 1984), 236∼238쪽. 심지어 지방교회에서 總部에 보낸 건의문 중에는 “敎主와 小使의 봉급을 동일히 하라”고까지 되어 있었다.280)<統一制와 聯合制에 대하여>(≪天道敎會月報≫150, 1923년 2월), 3쪽. 권위에 항거하고 연합제로 교회를 운영하려는 방식은 아나키즘과 가까웠다. 이들은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만주에 공산제에 가까운 천도교적 이상촌을 건설하려고 하였다.281)조규태,<천도교연합회의 변혁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4, 1996), 240∼241쪽.

 또한 이들은 항일정신을 견지하고 천도교연합회가 분립한 직후인 1922년 국내에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6년 만주의 吉林에서 正義府·衡平社와 3각동맹을 이루어 高麗革命黨을 조직하였다. 1923년 4월 임시종법사회의 결의로 中央總部가 中央宗理院으로 바뀐 후 종법사회에서 중요사항을 결정하던 것을 13명으로 구성된 宗理師會에서 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자 권동진·權秉悳·李炳憲·朴準承 등 천도교의 구세력들은 그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더군다나 1925년 4월의 정기법회에서 천도교의 기념일이 天日(대신사 득도일, 4월 5일)·地日(해월신사 승통일, 8월 14일)·人日(의암성사 승통일, 12월 24일) 3회로 한정되고 박인호의 승통기념일이 기념일에서 제외되었다. 그 결과 천도교의 구세력은 그 영향력이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282)조규태,<천도교 구파와 신간회>(≪한국근현대사연구≫7, 1997), 195∼198쪽.

 그런데 마침 1925년 3월 일본에서 보통선거법이 통과하자 천도교에서도 자치의 실현에 대비하여 1925년 4월 천도교청년당의 중앙위원회에서 일반 정치노선을 작성하고 농민층을 확보하는 쪽으로 운동의 중심을 전환하고, 중국의 국민당·일본농민동맹·모스크바의 국제조직들과 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박인호에 이어 교주가 될 것을 꿈꾸고, 천도교가 순수한 종교적 결사체로 운영되기를 희망하고 자치운동의 추진을 반대하였던 吳榮昌系의 교인들은 1925년 4월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집권파에 가서 교주제의 부활을 주장하였다.283)≪齋藤實文書≫10(高麗書林, 1990), 457쪽.

 오영창계의 교인대회측과 종리원 집권파(신파)와의 갈등이 야기되자, 李鍾麟·金庚咸·申泰舜·金永倫·鄭容根·金在桂·李時雨·權東鎭·韓賢泰·朴準承·李炳春 등은 8월 20일 오영창계의 교인대회와 천도교종리원의 통일을 표방하면서 統一期成會를 조직하였다.284)≪東亞日報≫, 1925년 8월 21일·23일. 이들은 전라도와 충청도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하던 천도교의 원로이었으나 정광조·최 린의 등장과 함께 그 영향력이 약화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천도교의 통일을 표방하면서 세력을 결집하고 결집된 세력을 바탕으로 교내의 지위를 강화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치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최 린 등의 천도교 신파에게 일정한 지분과 역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권파는 교권의 양보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치운동의 핵심에서 통일기성회측을 배제하였다.

 그러자 통일기성회는 1925년 말 교권파 종리사에 반대하는 오영창의 교인대회에 접근하여 1925년 11월 교주제를 부활하여 박인호를 4세교주로 한다는 조건에 합의하고 오영창계의 교인대회와 통합하여 ‘천도교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6년 1월에는 이 중앙위원회의 명칭을 중앙종리원이라고 고치고 최 린계열의 종리원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추진하였다.285)김정인, 앞의 글, 177∼180쪽. 이들은 천도교의 집권파에 비하여 대체로 입교 연대가 오래되므로 구파라고 불렸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박인호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기성회는 대체로 이남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었고 東學시대에 입교한 천도교의 구세력이었으므로 천도교 구파라고 불렸다.

 천도교 구파는 “자치는 일대 시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며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가 주도하는 조선공산당에 접근하였다.286)京城鐘路警察署長,<民族主義運動勃興ニ關スル件>(1926년 1월 29일). 또 1926년 4월 朴來源·朴來泓의 발의로 천도교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천도교는 천도교인 姜達永이 당수로 있던 제2차 조선공산당과 제휴하였다. 천도교 구파는 천도교청년동맹이 전위가 되어 격문의 인쇄와 전파, 사람의 동원 등을 위해 활동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조직적으로 만세시위를 벌이지는 못하였다.287)<天道敎靑年同盟執行委員會第一回會錄>(≪天道敎會月報≫184, 1926), 4·40쪽.
조규태,<천도교청년동맹의 조직과 활동>(≪충북사학≫9, 1997).
6·10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천도교청년동맹의 대표위원이었던 박래홍은 구파측 원로인 권동진과 함께 1926년 말 新幹會를 창립하기 위한 모임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창립되었을 때 권동진은 부회장, 박래홍과 이종린은 간사에 선임되었다. 또 천도교 구파는 신간회 경성지회·수원지회·장흥지회 등의 지회에서 계몽운동, 민중의 권익 옹호, 광주학생의거 동조활동을 전개하였다.288)조규태, 앞의 글(1997).

 한편 통일기성회와 함께 중앙종리원을 조직하였던 오영창계 교인들은 1927년 9월 평북 영변에 六任所를 정하고 4천여 명의 교도를 이끌고 분립하였다.289)李庸昌,<1920년대 天道敎의 紛糾와 民族主義運動>(중앙대 석사학위논문, 1993), 80∼81쪽. 이들은 동학시대의 육임제, 즉 敎長·敎授·都執·執綱·大正·中正의 제도를 준수하여 六任派라고 불릴 정도로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다. 그리고 이들은 통일기성회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신간회 활동보다 종교적인 활동에 치중하였으며, 현실적으로는 오영창이 5세 교주가 되려는 마음에서 교주제의 부활을 희망하였다.

 천도교 연합회와 구파와 육임파가 분립하고 난 후 남은 천도교의 주류가 신파였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평안도·함경도 등 이북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대체로 동학농민운동 이후에 입교한 사람들로서 계급적 성격이 남한 출신의 東學徒와 달리 자영농 혹은 중·소지주들이 많았고, 동학농민운동시 큰 피해를 입지 않아 반일감정이 이남지역의 천도교인들에 비하여 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반봉건·반외세적 운동을 지향하기보다는 친외세·개화적인 운동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진보회·일진회를 조직하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 대한제국정부의 개혁과 개화운동을 추진한 주역이었으며, 1920년대 천도교의 문화운동을 추진한 주체였다.

 참고적으로 천도교 각 파의 교세를 제시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 이에 제시된 교인의 수는 터무니없이 적지만 그 대체적인 교세는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천도교 신파의 교인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으로 구파·육임파·연합회파의 순으로 많았다.

시기\구분 천도교 신파 천도교 구파 천도교연합회
천도교 구파 천도교 육임파
1922년 12월
(연합회 분립기)
      12,000여 명
1925년 12월
(구파·육임파 분립기)
98,500명 6,400여 명   5,000여 명
11,800여 명
1927년 9월
(육임파 분립기)
  6,000여 명 약4,000여명  
1930년 11월 63,849명 14,142명 3,941명 435명
1930년 12월
(신파·구파 합동기)
56,800명 18,000여 명 3,180명 1,300여 명

<표 1>천도교 각파의 교도수290)朝鮮總督府,<最近の天道敎と其の分裂より合同への過程>(高麗書林 影印,≪藤實文書≫10, 1990), 466∼468·575쪽. 이 숫자는 정기적으로 성미를 내는 숫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실제 교회에서 말하는 교인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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