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3. 불교
  • 1) 식민지 불교의 성립
  • (2) 원종 및 임제종의 퇴진

(2) 원종 및 임제종의 퇴진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자주적인 종단의 설립 자체를 부정하였다. 이에<사찰령>시행 전후에 있었던 종단인 圓宗과 臨濟宗은 자연 퇴진하였다. 원종은 1908년 3월 전국 승려대표가 元興寺에서 모여 만든 종단이었다. 그러나 원종은 경술국치 전후에도 당시 구한국정부 및 일제당국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원종을 주도하였던 해인사 승려 李晦光은 원종의 인가를 위해 친일파 및 일본불교의 유력한 승려의 협조까지 활용하였지만 끝내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이에 이회광은 1910년 9월말 원종의 인가 및 불교 발전을 위한 복안을 강구키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회광은 일본에 가서 일본불교의 曹洞宗 관장을 면담하고 원종과 조동종간의 ‘연합’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306)金光植,<1910年代 佛敎界의 曹洞宗 盟約과 臨濟宗 運動>(≪한국민족운동사연구≫12, 1995), 106∼109쪽. 그러나 그 연합의 저변에는 단순히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의 일개 종파인 조동종에게 매종한 성향이 깔려 있었다. 즉 한국불교의 전통을 무시한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이는 원종의 인가를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불교의 발전과 중흥을 위한 자주성의 한계라는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회광은 귀국한 이후 연합의 내용을 공개치 않고 추인을 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에 의하여 그 내용은 전불교계에 알려졌다.

 이에 불교계에서는 그 내용이 민족불교를 저버린 것으로 단정하고, 반발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이 운동이 바로 임제종운동이었다.307)金光植, 위의 글, 110∼115쪽. 韓龍雲·朴漢永 등이 중심이 된 그 운동은 주로 전라도 및 경상도 일대에서 시작되어 전불교계로 파급되었다. 이 운동은 1911년 1월 송광사에서 개최된 조동종맹약 규탄대회로 가시화되었다. 당시 그 대회에서는 조동종맹약을 비판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은 임제종에 있음을 선언하고 임제종 종무원을 발족시켰다. 그 이후에는 임제종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이론의 정비와 포교의 강화를 시도하면서 임제종이 주도한 사법과 승규를 제정하여 일제당국에 승인받으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한편, 임제종은 범어사·통도사·해인사를 임제종 3본산으로 정하고 종무원 사무소를 범어사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당시 불교계는 북측의 원종과 남측의 임제종이 대립하는 사정이었기에, 북측을 北黨으로 남측을 南黨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임제종의 주도자들은 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서울에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건립하였다. 1912년 5월 26일에 개최된 개교식은 성황리에 개최되어 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가<사찰령>을 제정·시행하였던 시기였다. 이에 임제종은<사찰령>체제에서 배제될 상황에 직면하였다.

 1912년 6월, 당시 일제는 원종과 임제종의 책임자를 초청하여 원종과 임제종을 불허하다는 방침을 통고하면서 그 간판의 철거를 종용하였다. 이에 원종은 그 제의를 수용하고 원종 종무원을 조선불교선교양종 본산 住持會議院으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개진하였다. 요컨대 일제의 사찰정책을 수용하였다. 임제종도 일제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기에, 그 중앙포교당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명칭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포교당의 운영을 주도하였던 한용운은 임제종운동의 정신을 계승키 위해 朝鮮佛敎會 및 佛敎同盟會를 조직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추진하였지만 일제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또한 임제종운동에 일정하게 관여한 白龍城이 禪宗臨濟派講究所를 설립한 것도 한용운의 지향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사찰령>체제의 등장은 자생적인 종단을 지향하였던 원종과 임제종의 퇴진을 가져왔다. 그러나 임제종운동에서 나타난 保宗정신과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의식은 이후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 자주화운동의 이념적인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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