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4. 유교
  • 1) 일제강점기의 유교문제

1) 일제강점기의 유교문제

 조선사회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동안 국권을 강탈당하고 식민지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교지식인은 안으로는 시대상황에 대한 대응자세에 따라 ‘보수적 도학자’와 ‘진보적 개혁사상가’로 나뉘었으며, 밖으로는 일제가 식민지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유교전통의 사회기반을 전반적으로 변혁시키며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교인의 항일의식이 다양하게 표출되었고, 이에 대응하는 일제의 유교탄압정책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수행되어 갔다.

 유교인의 항일운동은 일제침략에 항거하여 상소하거나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던 국권수호운동에서부터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서 국권회복을 추구하는 독립운동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조선사회의 정통이념으로서 유교는 1910년 이전까지 항일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국권상실의 충격과 사회체제의 전면적 변화에 따라 점차 그 사회적 권위를 상실하고 공동체의 결속력도 약화되면서 그 역할도 급격히 쇠퇴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儒林들은 조직화된 단체활동에서는 매우 미미하였으나 개인적 신념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저항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병자수호조약>(1876) 이후로 을미사변(1895)·<을사늑약>(1905)·한일합병(1910) 등 일본의 조선침략이 더욱 심화되는 과정에서 당시의 유림들은 상소를 올리거나 義兵을 일으키고, 또는 개인적인 결의로서 자결을 하여 大義를 밝히는 등 가장 강력하게 저항운동을 지속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과 탄압에 저항하면서 유교전통의 질서를 지키려는 ‘도학전통의 보수적 유림들’이 수구세력으로서 유림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급변하는 시대조류의 대세를 간파하고 사회의 변혁을 도모하던 개화사상가들이 출현하고, 이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적 각성을 추구하던 애국계몽사상가들이 활발하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적 유교지식인’들로서 소수의 지식인들이 여기에 속하고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 개화사상 내지 계몽사상을 표방하는 진보적 사회개혁운동가들 사이에는 이미 유교이념의 기반을 탈피하고 유교전통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인물들이 점차 증가해갔다. 이에 따라 절대 다수의 보수적 유교인이 소수의 진보적 유교인의 활동을 외면함으로써 유교집단의 전체적 보수성과 시대적 대응력의 약화에 따라 유교인의 사회활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갔다. 사회개혁의 추진이 곧 당시 침략세력으로서 서구화를 추진하던 일본의 모방과 수용에 빠질 위험이 있음을 경계하여 유교의 개혁의식은 침체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서구적 근대화로 개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이런 소극적 방어자세는 마침내 수구의식의 폐쇄화와 더불어 쇠퇴과정을 초래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국내에서 유림의 의병운동이 철저히 분쇄당했고, 국권상실의 충격으로 대부분의 도학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숨어 전통을 지키겠다는 자세를 보이면서, 유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전반적으로 급격히 쇠퇴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의 문화적 기반은 유교전통의 틀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소수의 선비들은 강한 신념의 항일의식으로 국권상실이후에도 민족자주의식과 독립운동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유교의 독립운동은 한말의 항일국권수호운동과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따라 상당한 전환과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352)韓末(1876∼1910) 유교의 국권수호운동에 관해서는 다음이 참고된다.
금장태,<종교를 통한 국권수호운동-유교>(≪한민족독립운동사≫2, 국사편찬위원회, 1987), 493∼542쪽.

 일제강점기에 유교의 저항활동과 일제의 탄압과정은 크게 3단계로 시대구분이 가능하다. ①1910∼1918년 사이는 합병의 충격과 일제의 교활한 회유정책, 혹독한 탄압으로 유교인의 저항운동이 국내에서의 소극적 저항에서 망명을 통해 적극적 독립운동으로 이전하는 양상을 보였던 ‘망명과 회유정책의 시기’라 할 수 있다. ②1919∼1930년 사이는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으로 儒林團사건이 일어났지만, 국내에서는 일제의 동화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유림의 소극적 저항운동과 병행하여 유교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유림의 독립청원과 유교개혁운동의 시기’라 할 수 있다. ③1931∼1945년 사이는 일제의 동화정책이 광범하고 철저하게 진행되면서 이에 대한 유림의 소극적이지만 끈질긴 저항이 지속되었던 ‘동화정책과 비타협적 저항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첫 단계로서 1910년 조선왕조(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선포되었을 때 유림은 극도의 통분과 비탄에 잠겼다. 당시에 나타난 저항의 행동양상은 자결을 하거나 입산하여 은둔하거나 만주·러시아·중국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작위나 은사금을 명목으로 유림지도층에 대한 회유정책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대한 거부로 충돌하였던 것이 이 시기의 뚜렷한 현상이다. 둘째 단계로서 3·1운동(1919)에 자극을 받아 전국의 유림들로 조직된 유림단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한 유림단사건(巴里長書事件)이 중요한 계기를 이루고 있다. 일부의 진보적 유림들이 1927년 설립된 新幹會에 참여하는 등 사회단체를 통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까지는 아직도 유림들의 사회활동이 미약하지만 존속하고 있었다. 셋째 단계로서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일어나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으로 확산되는 시기에 유교의 조직적 활동은 거의 붕괴되었지만,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한 거부를 통해 저항을 지속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유교인은 초기의 강력하고 적극적인 저항운동에서 후기로 갈수록 유림조직이 와해되자 개인의 비타협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향촌사회의 유대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유림세력의 저항적 신념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유교조직 가운데는 일제의 회유에 끌려들어가 친일단체로 전락한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 저항의식은 온갖 어려운 시련을 견디며 확고한 신념을 발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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