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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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유교
  • 3) 계몽운동과 유교개혁운동
  • (1) 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

(1) 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

 일제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서 학교교육에서도 우리 말을 비롯한 우리 역사와 우리 지리에 관한 교육도 배제하였으며, 식민지사관에 의하여≪조선사≫38권을 편찬하는 등 우리 역사를 왜곡시킨 역사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우리 역사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고 집요하게 기도해왔다. 그러나 이에 맞서 당시의 독립지사는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 민족사와 민족문화의 연구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여기에 유교지식인들은 수구적 도학자나 진보적 계몽사상가의 양쪽에서 각각의 시각에 따라 민족사연구와 저술에 많은 업적을 쌓아갔다.

 우리 역사를 강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으로 저술하는 작업은 유교사상에 기반을 둔 계몽사상가 내지 독립운동가들에서 볼 수 있다. 박은식은 합방전에 언론활동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양명학자이며,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방법으로서 일본의 국권침탈과정과 망국의 통분을 서술한≪韓國痛史≫(1915)와 합방후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과정을 서술한≪獨立運動之血史≫(1920)를 저술하였다. 신채호는 유학자로 출발한 계몽사상가요 독립운동가로서 합방이전에도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민족영웅의 전기를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지만, 1910년 중국에 망명한 뒤로 역사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민족주의사관을 확립하여 우리 민족의 근원인 고대사연구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 사이에≪朝鮮上古史≫·≪朝鮮上古文化史≫·≪朝鮮史硏究草≫등을 저술하여 국내 신문에 연재함으로써 민족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열어주었다. 李建芳의 문인인 양명학자 鄭寅普는 1935년≪동아일보≫에<5千年間 朝鮮의 얼>이란 제목으로 연재하였던 글인≪朝鮮史硏究≫를 통하여 치밀한 고증으로 우리 역사를 통해 ‘조선의 얼’을 일깨워주는 민족사관을 전개하였다.360)愼鏞廈,≪朴殷植의 社會思想硏究≫(서울대 출판부, 1982), 262∼311쪽.
―――,≪申采浩의 사회사상연구≫(한길사, 1984), 58∼62쪽.

 金澤榮(호 滄江)은 계몽사상가와 전통도학자의 양쪽과 깊은 교유를 맺고 있었던 유교지식인이었으며, 한말에 史官으로서≪東國歷代史略≫(1899) 등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905년 망명하여 上海·通州 등에 머물면서 우리 역사서의 편찬에 주력하여,≪韓史綮≫(1918)·≪韓國歷代小史≫(1922) 등을 저술하고,≪校正三國史記≫(1910)·≪新高麗史≫(1924) 등 우리 역사의 고전을 간행하였다. 그는≪韓史綮≫에서 조선의 太祖가 고려의 두 王(禑王·昌王)을 시해하고 恭讓王의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기술하는 등 君主시대를 넘어서서 공화제에 입각한 사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로 인해 柳必永(호 西坡) 등 보수적 도학자들의 격렬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361)柳必永은<記金澤榮史綮誤>를 지어 김택영의≪韓史綮≫에서 太祖와 世祖를 왕위찬탈자로 규정한 것에 대해 先王을 모욕하는 것이라 반박하여 道學전통의 史觀을 제시한다. 또한 柳寅植(호 東山)은 우리 역사를 민족사관에서 서술한≪大東史≫를 저술하여, 단군조선이후 고려이전까지 우리 역사를 南朝와 北朝로 파악하고, 조선의 판도로 만주대륙을 포함시키며, ‘倍達族’을 조선족·북부여족·예맥족·옥저족·숙신족을 포함하는 것으로 제시하여 확대된 민족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김택영의≪한사계≫에 내포된 사대주의적 요소를 조목별로 비판하는<金史記誤>를 저술함으로써 자신의 민족사관을 더욱 선명하게 확인하고 있다.362)금장태·고광직,≪儒學近百年≫(박영사, 1984), 419쪽.

 도학자들은 민족의식보다는 의리정신에서 민족사의 서술과 일제에 저항한 節義의 인물들에 관한 전기를 저술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鄭衡圭(호 蒼樹)는 망국의 통분 속에 우리 역사를 野史로 서술하여 민족적 義氣를 고취하고자 하여≪韓史抄輯≫을 편찬하였으며, 또한<乙巳殉國諸公傳>·<丁未三密使傳>·<庚戌殉義諸公傳>·<韓末殉國烈士諸公傳>등 항일 의사들의 전기를 기록하여, 순국정신을 표양하고 있다. 또한 金澤述은 金暻中이 편찬한≪朝鮮史≫를 검토하고서<觀朝鮮史>(1943)를 썼는데, 제목이 ‘韓史’라 하지 않고 ‘朝鮮史’라 한 것부터 식민사관의 표현이라 규정하여 비판하고 있다.363)당시 道學者들 사이에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국호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李震相과 田愚의 학맥 안에서는 ‘韓’이란 호칭을 쓰고, 李恒老의 학맥 안에서는 ‘朝鮮’이라고 썼다. 河謙鎭(호 晦峰)은<國性論>(1921)을 지어 우리의 민족문화가 지닌 본질인 國性을 ‘禮義’로 제시하였으며,<安義士傳>·<露梁忠烈祠記>·<名將列傳>·<勇將列傳>등 안중근을 비롯하여 외적의 침략을 막아낸 명장과 용장 등 민족적 영웅들의 전기를 저술하여 민족기상과 항일의지를 진작하고자 하였다. 그는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여≪東儒學案≫(1943)을 완성함으로써 한국유학사를 체계화하여, 민족문화의 유산을 정리하는 데 중요한 업적을 남겨주고 있다.

 李炳憲(호 眞菴)은 康有爲의 영향아래 今文經學의 연구와 孔敎운동을 전개한 인물로서,≪歷史敎理錯綜談≫(1921)을 지어 舜이 동이족임을 확인하고 동시에 여진족의 金과 淸, 몽고족의 元 등이 중국을 지배하였던 사실을 모두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우리 민족이 중국을 4차례 지배한 것으로 보는 ‘大民族史觀’을 제시하고 있다. 안동의 李源台도 대민족사관에 근거하여≪倍達族疆域形勢圖≫를 지어 만주와 요서지역 및 중국 동해안에 걸치는 배달족의 영역을 지도로 제시하고 있다. 朴章鉉(호 中山)은 민족의 자기성찰과 사상의 진보를 위해 史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海東春秋≫·≪海東書經≫을 저술하였다. 또한 우리 역사를 經傳의 체제로 재구성함으로써 민족사를 경전과 일치시키는 독특한 작업을 하였으며,≪朝鮮歷代史略抄≫·≪野史≫등의 민족사와 민족문화의 편찬작업을 수행하였다.

 유림으로서 민족의식을 배양하기 위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한 경우는 그 운동영역이 매우 한정되어, 주로 전통적 국가관에 의한 의례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 교육운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로 치우쳤다. 의례를 통한 민족의식의 표출은 주로 고종과 순종의 죽음이라는 기회에 거국적 의례로서 國喪에 상복을 입고 哭班에 참여하는 전통을 따름으로서 前왕조에 대한 추모와 그 遺民으로서 자각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3·1운동의 시기로 고종의 因山日을 잡았던 것도 백성들이 몰려드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1926년 순종의 죽음에도 유림들은 상복을 입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합방으로 국가의 멸망을 보고서 상당수의 유학자들이 상복을 입거나 白笠을 쓰고 다님으로써 국가의식을 각성시켰다.364)고종 승하시 白笠을 썼던 吳駿善은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춘추의리에 따라 白笠을 쓰고 일생을 마쳤다.

 유림은 전통적으로 후진교육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왔지만,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서도 대부분 전통의 한학과 유교경전교육에 치중함으로써 의리정신을 확고하게 견지하는 데에는 기여하였지만, 민족독립의식을 강화하는 데에는 매우 미약하였다. 당시의 많은 유학자들은 자신의 서재나 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엄격한 學規로 학풍을 강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安圭容의<竹谷精舍講規>에서는 “士族이나 庶類의 신분을 막론하고 배움에 뜻을 둔 자는 모두 입학을 허가한다”고 규정하여 신분차별의 폐지를 선언하기도 한다. 金澤述(田 愚 문인)은 萬宗齋·東谷書齋 등에서 강학을 하면서 엄격한 학규를 제정하고, 학생들의 수학정도에 따라 4등급으로 分班하며 각 반에 原課와 間課의 과목을 설치하는 체계화된 교과과정을 설정하였다.365)금장태·고광직, 앞의 책, 48쪽. 이에 비해 유인식은 전통 유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유교사상의 근대적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1907년 서원의 재산을 이용하여 안동에 協東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920년 李商在 등과 전국교육기관의 협의회인 朝鮮敎育協會를 조직하고, 大邱에 嶠南學館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1923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하여 중앙위원으로 모금운동을 벌이는 등 교육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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