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4. 유교
  • 5) 일제의 동화정책과 유교전통의 파괴
  • (2) 일제의 문화적·풍속적 동화정책

(2) 일제의 문화적·풍속적 동화정책

 일제의 식민지 통치정책은 1910년대의 무단정치와 3·1운동이후 1920년대의 소위 문화정치를 거쳐 1930년대로 들어가면서 한민족의 문화전통을 철저히 말살하여 일본문화에 동화시키고자 기도하는 민족말살정책 내지 동화정책을 전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제가 만주와 중국 대륙 및 태평양으로 세력 확장의 침략을 계속하던 시기에, 우리의 문화전통을 말살하고 황국신민화를 시도한 중요한 사건을 유교적 신념의 관심에서 주목한다면 ①일본어 강요, ②皇道儒敎化, ③창씨개명의 3가지를 열거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제의 강력한 민족문화말살과 민족동화정책에 대해 가장 집요한 저항과 거부운동을 전개한 집단은 전통문화의 고수에 강인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유림집단이었다.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한 유림의 저항태도는 민족의식으로만 연결시켜 보기 어려운 수구적 성격을 지닌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동화될 수 없는 민족의식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먼저 일제는<조선총독부교육령>에서 “국민(한국국민)의 성격을 함양하기 위하여 국어(일본어)보급”을 목적으로 규정하여, 모든 과목을 일본어로 교육함으로써 처음부터 동화정책을 전개하였다.377)일제하에서 보통학교 수업은 주26시간 가운데 일본어 10시간, 고등보통학교 수업은 주30시간 가운데 일본어가 8시간으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 51∼53쪽.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동화정책의 방법으로 황민화운동을 강화하면서 1938년부터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압박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당시 다수의 유림은 일본의 교육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新制學校에 자녀들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일제의 식민지교육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러한 제도교육의 거부는 비록 가정에서 한학교육을 받는다 할지라도 식민지체제 아래서 자손들의 사회활동을 스스로 봉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제도교육의 학력이 없어 사회진출에 심한 제한을 받게 되는 엄청난 피해를 겪어야 했다. 또한 가정에서 일본어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였던 것은 유림 가정의 일반적 사실이다. 그러나 유림에게 우리말은 한글이라기 보다 漢文이었던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378)예를 들어 鄭璣淵은 해방후에도 한글전용론에 반대하면서 漢字의 우월성을 고집하였다. 금장태·고광직, 앞의 책(1984), 207∼208쪽.

 다음으로 일제의 신앙적 동화정책은 일찍부터 친일유교단체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붕괴시키고자 시도하였다. 일제는 1911년 성균관을 폐지하고 경학원으로 개칭하며, 그 뒤 경학원을 다시 明倫專門學院으로 개칭하여 皇道儒林의 양성기관으로 삼았고, 일제말기에는 명륜전문학원조차 폐쇄하여 明倫鍊成所로 개편함으로써 유교기관을 점진적으로 괴멸시켜 갔다. 특히 친일유교인으로 황도유교를 표방함으로써 천황의 통치체제를 유교이론으로 합리화시키게 하여 일제의 동화정책에 앞잡이로 삼았다.379)心山思想硏究會 編,≪金昌淑文存≫(성균관대 출판부, 1986), 289∼290쪽.
금장태,≪유교사상과 한국사회≫(성균관대 출판부, 1987), 283쪽.
일제는 중일전쟁을 계속하던 1938년부터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을 창립하여 국가동원의 정신적 통제를 강화하자 이듬해 친일유교인들은 조선유림대회를 열어 국민정신총동원에 협력할 것을 결의하는 행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모든 협력을 거부하는 유림의 주류는 친일유림에 의해 점령된 성균관·향교의 조직을 떠나서 서원·서당의 민간조직을 통해 결속하거나, 어떤 기구에도 관계하지 않고 개인적 인간관계의 강한 유대를 통해 유림조직으로서 항일 저항의식을 의리의 당면과제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지속적으로 단발을 강행하였지만 유림들은 保髮을 자신의 전통을 수호하는 상징으로서 소중히 하였다. 申益均은 머리를 깎은 사람은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자가 머리를 깎으면 門人錄에서 삭제해버리기 까지 하여 강경하게 단발을 거부하였다. 그의 제자 梁本錫이 1934년 머리를 깎이지 않으려다 일경의 칼에 찔려 죽자, 그는 제문을 지어 “천지의 올바른 성품을 잃지 않고 성현의 큰 훈계를 준수하여 상투를 지켜서 오늘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 몸은 죽었으나 그 넋은 죽지 않았다”고 위로하고 있다.380)금장태·고광직, 앞의 책(1984), 123쪽. 일제의 동화정책은 1940년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함으로써 그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는 일제말기로서 전시의 위압으로 강제화하여 시행 7개월만에 80%가 창씨를 할만큼 대부분이 휩쓸렸고, 심지어 명망있는 유학자도 그 강압에 견디지 못하고 굴종한 경우가 많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