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5. 개신교
  • 3)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을 위한 활동
  • (4) 문학·음악·미술·건축

(4) 문학·음악·미술·건축

 문학가 중 기독교와 연관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광수도 한때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崔南善 역시 기독교계와 교류하고 있었다. 金東仁의<약한 자의 슬픔>·<마음이 얕은 자여>·<유서>·<명문>·<신앙으로>등에서도 기독교적 색채를 엿볼 수 있다. 전영택의<생명의 봄>·<天痴? 天才?>·<화수분>·<흰 닭>등의 바탕에는 기독교적 인본주의가 깔려 있으며, 朱耀翰의<벽모의 묘>·<말>등에는 메시아사상과 견줄 수 있는 미래지향적 소망이 담겨져 있다. 任英彬의<난륜>·<목사의 죽음>등에도 기독교적 성격이 짙으며, 金末峰의<밀림>·<찔레꽃>·<푸른 날개>등에서는 기독교적 희생과 인내, 朴啓周의<순애보>·<진리의 밤>·<구원의 정화>등에서도 기독교적 인본의식이 나타난다. 여류시인 張貞心의 시집≪주의 승리≫·≪금선≫등에는 민족의식이 깔려 있다. 그밖에 1930년대 등단한 金東里·金顯承·盧天命·毛允淑·朴斗鎭·尹東柱·林玉仁·黃順元 등도 기독교인이었다.394)김희보,<한국기독교문학사>(≪한국기독교성장100년≫, 기독교문사, 1986).

 미술계에서는 金俊根·金殷鎬·金基昶·金學洙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김준근은 한국 번역문학의 효시라 불리는≪텬로력뎡≫(天路歷程)의 삽화를 그린 바 있는데, 그는 등장인물들에게 한국식 전통복장을 입혔다. 김은호의<부활 후 그리스도>는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상작인데, 제자와 여인들이 부활한 예수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김기창·김학수 등이 그 뒤를 이어 기독교 성화를 그렸다. 이들이 모두 동양화가라면 吉善宙의 아들인 吉鎭善은 서양화가로서는 최초로 기독교 성화를 그렸다고 한다.395)이연호,<한국기독교미술사>(≪한국기독교성장100년≫, 기독교문사, 1986).

 건축 분야를 보면 한국 교회의 건축물들은 서양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00년에 지은 성공회 강화성당은 한국의 佛堂式 건축 양식과 서구의 바실리카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특수한 형태였으며, 1922년 세운 성공회 서울대성당도 외형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지만 내부의 제단과 천장 등에는 한국의 전통양식을 가미했다. 또한 남녀내외가 엄격했던 우리의 문화를 고려하여 남녀 좌석을 구별, 서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든 ㄱ자 예배당도 독특한 우리의 건축물이다. 황해도 소래교회, 평양 장대현교회, 서울 새문안교회, 전주 서문교회 등이 ㄱ자형의 전통 한옥 예배당이다. 1937년 지어진 강원도 김화읍교회는 전통 한옥양식에다 실내의 강단 주위에 단청을 칠하고 벽면에 한국식 성화를 그려 기독교 토착 미술을 잘 보여준다. 이 벽화 속의 예수는 한복을 입고 있다.396)위와 같음.

 한편 음악 분야를 보면, 서양음악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기독교의 전래와 그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초기에는 교회음악이 거의 유일한 서양음악이었으며, 또 초기 서양에서 음악을 전공한 유학생들도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정동교회를 비롯한 개신교회에서 음악활동을 하거나, 이화학당·이화여전·숭실전문·연희전문 등 기독교계 학교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학생들 중 한국 음악계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이 대거 나왔다. 金仁湜·尹克榮·玄濟明·洪蘭坡 등 한국 근대음악계의 선구자들도 개신교인이었다. 이들은 교회음악뿐 아니라 동요나 민요의 창작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윤극영의<반달>이나 홍난파의≪조선동요 100곡집≫, 姜信明의≪아동가요곡 3백곡≫, 朴泰俊의≪동요집≫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한국 기독교 음악은 주로 서양음악의 도입과 연주라는 분야에 국한되고 토착적 기독교 음악을 창출하지는 못했지만, 민족의 감성과 염원을 음악에 담은 점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397)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앞의 책,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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