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1. 과학
  • 1) 국내 과학기술교육의 여건

1) 국내 과학기술교육의 여건

 이 시기 국내에서의 과학기술교육은 상당히 취약하였다. 대학으로는 뒤늦게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유일한 곳이었다. 전문학교는 몇 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세울 만한 숫자와 규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가 세운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선교사들이 운영한 연희전문학교 數物科, 한국인이 설립한 대동공업전문학교 등이 그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하급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중등학교는 여러 개가 세워져 이공계 교육기관의 가장 주된 형태를 차지하였다.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고 그 교육을 추진한 세력은 일단 세 집단, 즉 일제·선교사·한국인으로 나뉘어진다. 식민지 지배와 경영의 필요 때문에 일제는 주도권을 쥐고 과학기술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과학기술이 조직적·재정적·정책적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발전하기 힘들만큼 현대적인 형태로 탈바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경쟁관계에 있던 선교사는 과학기술을 기독교 전도의 방편으로, 한국인은 다분히 실력배양 및 양성의 일환으로 관심을 기울이나 상당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이전에 이미 한국에는 이공계 교육기관이 다수 세워져 운영되고 있었다. 국가에 의해 관립 형태로 농상공학교·鑛務학교·郵務학당·電務학당·측량견습소, 민간에서도 직조·철도·측량·공업제조 등과 관련된 교육기관이 잇달아 만들어졌다.453)이들 교육기관은 1899년에 관립상공학교 관제가 반포된 것을 계기로 그 직후에 대거 세워졌다.
朴星來,<開化期의 科學受容>(≪韓國史學≫1, 1980), 251∼268쪽.
金泳鎬,<韓末 西洋技術의 受容>(≪亞細亞硏究≫11-3, 고려대, 1968), 297∼343쪽.
金義煥,≪우리나라 近代技術敎育史硏究-舊韓末(1876∼1910)을 中心으로-≫(博英社, 1971).
물론 이들은 초보적인 수준으로서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 안정되게 운영되지는 못하였고 더구나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의 등장은 아직 요원한 일로 보였다. 그럼에도 이들 교육기관은 해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국인과 초빙된 외국인 전문가들에 의해 서서히 그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되면서 과학기술교육은 일대 개편을 겪게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특히 고급인력일수록 필요한 과학기술자는 일본인을 쓰면 되지 한국인을 새로이 교육시켜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하급인력의 경우 분야에 따라 한국인 대상의 기술교육이 유지, 확충되기도 했으나 많은 교육기관은 일시에 사라지는 결과를 맞기도 하였다.454)가장 대표적으로 광무학교·우무학당·전무학당·철도학교 등이 폐지되었다.
金根培,<대한제국기∼일제 초 官立工業傳習所의 설립과 운영>(≪韓國文化≫18, 서울대, 1996), 423∼465쪽.
李鎭昊,≪大韓帝國地籍 및 測量史≫(土地, 1991).
이에 따라 일제의 과학기술에 대한 교육시책은 한국인 중심의 하급 기술교육과 일본인 중심의 고등교육으로 방향이 잡혀져서 추진되게 되었다.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으로는 가장 먼저 1915년에 경성고등공업학교가 세워졌다. 이는 한국인의 반감 및 저항을 무마하고 대내외에 자신의 善政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의도로 추진되었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하기 위한 갖가지 새로운 조치와 더불어 분야별로 전문학교를 1개씩 설립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공업전문학교는 한국을 개화시킬 근대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가장 앞서서 시행되어 나갔다. 그렇지만 이 학교는 한국인을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중도에 대거 탈락시키고 3·1운동 다음해부터는 內鮮공학의 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분하에 아예 일본인 위주의 교육기관으로 바뀌었다. 즉 한국인은 전체 정원의 1/3 이내로만 선발하고 그것도 인기가 없는 학과들에 주로 배정되었던 것이다.455)경성고등공업학교는 공업전습소에 설치된 특별과가 확대 개편되는 방식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정인경,<경성고등공업학교의 설립과 운영>(김영식·김근배 편,≪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 창작과 비평사, 1998), 167∼202쪽.
姜 雄,<京城高等工業學校と植民地朝鮮の技術者養成>(≪科學史硏究≫II-35, 1996), 1∼14쪽.

 일제의 주도로 과학기술 분야의 교육기관들이 다소 확충된 것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 후반부터였다. 무엇보다 한국 및 대륙지역에서의 광업 개발이 크게 요구되면서 그에 필요한 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경성광산전문학교가 1939년에 세워졌다. 전시상황으로 수요가 늘어난 통신인력을 충당하고자 전문학교 수준의 조선무선통신학교가 다음해에 개설되고, 아울러 경성고공이 확충되면서는 그 부설로 이과교원양성소도 설치되었다.456)金英宇,≪韓國中等敎員養成敎育史≫(敎育科學社, 1989), 36∼47·56∼69쪽. 그리고 이 시기에 가장 특기할 만한 일은 한국에서 최초의 이공계 학부인 경성제대 이공학부가 1941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학부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교수들의 연구활동이 중심이 되고 인력양성을 위해 교육활동이 그것에 부가된 형태를 띠었다. 특히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토륨을 포함한 희귀 원소를 개발할 의도로 그 부존지로서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한국에서 이들을 발견, 연구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이 학부는 학생들을 매우 적게 받아들였고 한국인은 그 중에 1/3 이내에 불과했으므로 소수의 졸업생만이 배출되게 되었다.457)京城帝國大學創立五十周年記念誌編纂委員會,≪紺碧かに:京城帝國大學創立五十周年記念誌≫(京城帝國大學同窓會, 1974).
金根培, 앞의 글, 366∼391쪽.

 이처럼 일제는 과학기술교육에서 한국인은 하급교육, 일본인은 고등교육을 시키는 식으로 민족에 따라 차별적이고 서열적인 정책을 폈다. 심지어는 하급교육도 그 실상은 일본인으로 채우지 못할 경우에 한해 한국인의 참여가 주어질 만큼 어느 분야보다도 훨씬 배제적이었다. 이는 과학기술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일제가 주도하던 관청이나 기업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식민지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극히 일부의 한국인들에게는 선정의 본보기로 고등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고등교육기관의 수가 워낙 적었던 데다가 그마저도 뒤늦게 세워진 관계로 배출된 인원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비교적 일찍부터 한국에서의 과학기술교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다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이고 사회의 각 전문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할 기독교 신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이들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일제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사업을 펼치고 있었으므로 상호간에 적지 않게 경쟁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YMCA, 경신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등 같은 선교기관이나 학교에 기술교육과정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어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세워지고 그 안에 한국 최초로 과학계 고등교육과정인 수물과가 만들어졌다. 이 학과의 운영에는 무엇보다 미국 북감리교 소속의 교육선교사들이었던 벡커(A. L. Becker), 루퍼스(W. C. Rufus), 밀러(E. H. Miller) 등이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내에서 과학을 전공한 전문인력은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배출되었으며 졸업생들은 중등학교 과학교원, 더러는 해외로 나가 수준 높은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458)閔庚培,<宣敎政策 決定過程에서의 宣敎本部 影響力의 問題-延禧專門學校 設立을 중심으로->(≪東方學志≫46∼48합집, 연세대, 1985), 555∼584쪽.
연세대학교 백년사편찬위원회,≪연세대학교백년사, 1885∼1985≫(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51∼63·143∼222·243∼304쪽.
이밖에 숭실전문학교에서도 이과를 개설한 적이 있었지만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들은 사실 과학기술교육에 대해 상당기간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왔다.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가 되면서 과학기술의 필요를 느끼기 힘들게 되었고 그를 진흥시킬 만한 현실적 힘도 갖출 수 없었던 데에 있었다. 과학기술은, 당시의 낮은 수준에서는, 급박하게 당면한 민족독립, 실력양성, 차별철폐 등과 같은 절박한 문제들과 직접적인 연결을 찾기가 어려웠다. 또한 과학기술은 국가 차원에서 그 진흥이 모색될 필요가 컸음에도 주권을 잃은 관계로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식민지체제가 한국 과학기술에서 빚어낸 가장 심각한 비극과 불행은 바로 사회적 당면과제와 과학기술 진흥간의 괴리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과학기술의 사회적 위상이 극도로 낮아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은 비교적 일찍부터 나타났다. 1910년대에 이미 일부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되었던 돈을 民立大學 설립기금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민립대학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 설립인가를 일제 총독부에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어 1920년부터는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개되면서 모금운동과 함께 대학설립안이 구체적인 형태로 모색되었다. 1천만 원의 거액을 확보하여 처음에는 기초 학문분야(법과·문과·경제과·이과)를 개설하고 이어 실용 학문분야의 학과들(공과·의과·농과)까지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459)盧榮澤,<民立大學 設立運動 硏究>(≪國史館論叢≫11, 국사편찬위원회, 1990).
이명화,<民立大學 設立運動의 背景과 性格>(≪한국독립운동사연구≫5, 독립기념관, 1991).
하지만 이 활동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당시 일제가 제기한 경성제대가 세워지는 데 일정한 힘을 행사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에 한국에서는 1930년대 초에 보성전문학교 창립30주년기념사업회 결성을 계기로 보성전문을 확충하여 이과·공과 등을 갖춘 대학으로 승격하려 한 적이 있었다.

 한국인들이 과학기술을 새롭게 자각하고 그 진흥을 위해 한층 노력하게 된 것은 1930년대 중후반에 전민족적으로 전개된 과학운동을 겪으면서부터였다. 각 부문에서 한국인의 역량을 결집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견지하고 자기 발전을 모색하려는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과학기술자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과학대중화와 전문연구기관 건립 등을 목표로 한 과학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지역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할 활동조직이 여럿 만들어지고 다채로운 과학 계몽활동이 추진되었다.460)임종태,<金容瓘의 발명학회와 과학운동>(김영식·김근배 편, 앞의 책), 237∼273쪽.
玄源福,<1930年代의 科學技術學 振興運動>(≪民族文化硏究≫12, 1977), 239∼286쪽.
자동차·방송·실험실 등과 같은 과학의 첨단기기와 새로운 모습을 적절히 동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기심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아울러 이 무렵부터는 일제가 대륙 개발에 의지를 갖고 세력 확장을 본격화하고 있던 시점이었기에 정치적 색채가 약한 과학기술과 관련된 한국인들의 활동은 제약을 덜 받으며 활기를 띨 수가 있었다.

 이 시기에 여러 개로 증설된 5년제 공업학교461)이들 5년제 공업학교는 중일전쟁 전까지 2개(경성공업학교, 진남포상공학교)에 불과하던 것이 이후 몇 년 사이에 10여개로 증설되었다.는 총독부의 허가와 일부 보조가 수반되었지만 당시 한국인들의 광범한 참여 열기와 재정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한국인들이 이끈 설립기성회의 활동을 통해 공업학교 설립 유치가 이루어지고 그에 필요한 재원이 마련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식민지 시기에 한국인이 세운 유일한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인 대동공업전문학교는 그 가장 두드러진 성과물이라고 하겠다. 이 학교는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를 당한 숭실전문학교 존속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광업가 李鍾萬이 150만 원의 거액을 들이고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1938년 평양에 세워졌다. 설립자 이종만은 금광 경영을 통해 모은 자금을 가지고 그 동안 꿈꾸어 오던 大同思想에 기반한 이상사회 건설, 보다 구체적으로는 열악한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를 획기적으로 개혁하는 일에 앞장 서왔다. 그 결과의 하나로 세워진 대동공전은 전적으로 한국인 학교로 운영됨으로써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다른 지역에서의 학교 설립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462)이 대동공전은 해방후 북한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金根培,<日帝時期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와 설립자 李鍾萬>(≪第39回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경제사학회, 1996), 309∼316쪽.
―――, 앞의 글(1996a), 306∼324쪽.

 그렇지만 한국인 혹은 선교사들에 의한 대학 설립은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학교설립운동이 활기를 맞던 1930년대 중반부터 보성전문,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이화여자전문학교, 뒤늦게 세워진 대동공전 등에서 대학 설립활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다. 과학계통으로는 보성전문이 공과·의과·이과, 연희전문은 이과·건축과, 대동공전은 공과·농과·의과·이과·이화학연구소 등을 갖출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들의 경우 한국인의 재력이 증진되고 교육에의 관심이 커져 어느 때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았지만, 곧 이은 중일전쟁과 세계대전의 발발로 역시 의도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고 말았다.463)金根培,<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인도·중국·일본과 비교해서->(≪한국근현대사연구≫8, 1998), 165∼168쪽.

 이렇듯 한국인과 선교사들이 만들거나 크게 후원한 학교들은 한결같이 한국인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입학생은 물론 교수진도 한국인이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다. 대동공전과 연희전문 수물과를 일제가 세운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광전·경성제대 이공학부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들 한국인 대상의 학교는 과학기술 분야로의 진학 기회가 극히 제약되어 있던 한국인 학생들에게 숨통을 틔어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당시 국내에는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이 너무도 적어서, 특히 대학 진학자일수록 절대 다수는 고등교육을 익히기 위해 해외유학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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