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2. 음악
  • 2) 제2기-문화통치기의 음악
  • (1) 한국음악사회의 통제

(1) 한국음악사회의 통제

 3·1운동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계에서는 노동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국외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 상해임시정부의 투쟁 그리고 미국에서의 독립청원운동 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노래들이야말로 애국가이자 항일가이었으며 독립운동가였다. 더불어 약체화되어가는 민족 전통음악의 ‘부활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를 펴면서 정치선전을 강화하였다. 1920년 4월 총독부는 관방에 활동사진반을 두어 전국 각지로 순회영사회를 실시하여, 한국 민족춤이나 이왕직 아악부의 연주광경을 보여주어 한국인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갖게 하는 정치선전을 하였다.501)김규환,<식민지하 조선에 있어서의 언론통제의 연구>를 인용한 강동진,≪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0), 40쪽에서 재인용. 또 1921년 4월1일부터 14일까지 일본 궁내성 악부 부속의 아악연습소 강사이었던 타나베 히사오(田邊尙雄)는 이왕직아악대·단성사·평양기성권번·경성 명월관을 차례로 방문하고는 조선아악의 존치와 대우개선을 조선총독부에 건의하여 이를 관철하였고, 이왕직 아악과 궁중 정재를 필름에 담아 전국순회영사회에서 소개하였는데 이것도 총독부가 한국음악을 보호하고 있다는 정치선전이었다.502)田邊尙雄,<朝鮮音樂日記>(≪音樂と蓄音機≫5, 東京, 蓄音機世界社, 1921), 61∼86쪽. 이 모든 것은 일선융화를 앞세운 선전책이었으며, 실제로 타나베의 모든 활동은 바로 ‘일선융화’를 위한 활동이었다.503)田邊尙雄, 위의 책, 1∼5쪽.

 일제가 문화시설을 확충하여 일선융화를 위한 정치선전으로 이용한 곳이 바로 1920년 7월에 준공한 경성상업회의소와 1927년 관영방송국인 경성방송국(JODK) 개국이었다. 경성상업회의소의 2층에 위치한 ‘경성공회당’은 종로의 중앙기독청년회관(YMCA)과 함께 음악회 개최장소로서 유명해졌다. 경성방송국 역시 정치선전 강화책의 하나로 세워진 방송국이었다. 경성방송국은 명창대회를 열거나, 명창들을 불러 방송하므로써 “조선사람들이 대단히 기뻐하기를” 기대했다. 실제로 1927년 8월 12일부터 5일간 李東伯·申錦紅·姜笑春·李花中仙·金秋月 등 5인을 하루 한사람씩 불러 방송하였으며, 신문들은 이를 “한국 성악을 대표한 이들의 소리가 전파에 싸이여 천하에 퍼지게 되는 것을 全鮮의 조선사람들은 대단히 기뻐한다더라”고 썼다.504)≪동아일보≫, 1927년 8월 12일.

 이외에 경성일보사 내 來靑閣도 새로운 공연장으로 부각되었다.

 1920년대 종로 중앙기독청년회관·경성공회당·래청각 등에서 활동한 주요 단체로는 경성악대, 연희전문학교 음악부, 여화여전 합창부, 경성의전음악부, 숭실대학 관현악대와 찬양대, 경성제국대학 관현악단, 硏樂會, 경성하모니카구락부, 배재고등보통학교 음악부, 조선가요협회와 그밖에 동경음악학교 동창회 등이 있었다. 특히, 연희전문은 1929년 현제명이 취임하면서 관현악부·합창·독창·바이올린독주·4중창단 연주가 많아졌다.

 이 시기에 활동한 피아노연주가로는 김영환·韓琦柱·朴慶浩와 이화여대 출신의 金合羅·尹聖德·金愛利施·金元福·高鳳京·스투테니 등이 있었고, 바이올린연주가로 洪蘭波 외에 桂貞植·洪載裕·安柄昭·金載勳 등과 와세다 출신의 蔡東鮮이 있었고, 첼로연주가 安益泰가 후반기에 부각되고 있었다. 소프라노는 야나기 카네코(柳兼子)·尹心悳·宋聖心 등이 있었고, 테너로는 安基永·權泰浩·玄濟明, 바리톤의 尹基誠과 金文輔 등과 崔虎永·金恩實·金活蘭·蔡奎燁·朴泰元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중진 음악가들로는 백우용·정사인·김인식·이상준·金亨俊 등이 있었다. 선교회나 의사 출신으로 룻츠(Mrs Lutz, 소프라노)부인·솔토부인·붓츠(Boots)부인(세브란스병원 치과의사, 바이올린과 피아니스트)·스미스(Smith) 등이 활동하였다. 이 중에서 평양 출신 음악가들은 현제명·박경호·朴元貞·金世炯·金東振·朴泰俊·車在鎰·권태호 등이었다.

 이 밖에 유명 외국인들의 내한공연도 있었는데, 유명한 바이올린의 연주가들인 F. 클라이슬러(1923. 5. 23, 경성공회당)·하이페츠(1923. 11. 5, 경성공회당)·짐발리스트(E. Zimbalist, 1924. 11. 25, 경성공회당)를 비롯하여 러시아 슬바반 스카야 합창공연(1927. 9. 23, 조선극장)과 일본의 소프라노 세키야 토시코(關屋敏子, 1927. 5. 29, 경성공회당)와 일본 해군군악대연주(1927. 4. 19 조선총독부청 앞 광장) 등도 있었다.

 전통음악분야는 이왕직아악대, 조선정악전습소, 조선권번·한성권번·달성(대구)권번·광주권번·공주예기상조회·평양기성권번·춘성권번(원산) 등 전국 각지의 권번, 광무대, 이화여전 조선음악부, 한양구락부, 공주음악협회, 인천의 朝鮮古正樂會, 朝鮮樂硏究會, 朝鮮音樂硏究協會, 朝鮮音樂協會505)조선음악연구협회와 조선음악협회는 조직 구성원에서 다르다. 전자는 한국음악을 부활하자는 목적으로 명창분야의 성악과 기악으로서 가야금·양금·단소·거문고·해금·퉁소·장고 등의 전통음악인들이었지만, 후자는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에 취미를 가진 인사로 한국음악을 부활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창립된 단체라서 그 성격이 다르다.≪조선일보≫, 1927년 11월 9·11일, 1928년 2월 13·19·20일., 청주음악구락부, 朝鮮音律協會 등과 판소리 명창 李東伯·宋萬甲·金昌煥·金昌龍·李素香·朴綠珠·金楚香·曺學珍·金錄珠·李中仙·申錦紅·姜笑春·李花中仙·金秋月·劉公烈·姜南中을 비롯하여 고수와 전통춤의 韓成俊, 가야금병창 沈相健·吳太石 등이 조선극장·종로중앙기독청년회관, 천도교백년기념관 등에서 활동하였다.

 비평가로 활동한 음악인들로는 홍난파·安廓·박경호·김영환·申孤松·엄흥섭·양창준·金泰午·洪鍾仁 등이 있었다.

 일제는 1910년 이전에 한국학생들의 일본유학을 수용한 데 이어, 20년대부터는 관비유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유학시킴으로써 친일지식인과 예술인들을 육성하고 이용하였다. 이 중에서 음악가들은 소프라노 尹心悳·韓琦柱, 바리톤 金文輔·朴桓秉 등이 일본의 관립 동경음악학교 사범과에 유학하였으며, 이들은 이후 탈민족적 성향의 음악활동을 전개한다.506)노동은,<삶과 죽음의 월계수-윤심덕>(앞의 책, 1996), 361∼371쪽.

 한편, 재경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1920년 2월 11일에 京城樂友會가 조직되었다. 일본인 이이다 고오자부로오(飯田興三郞) 등이 발기인들이 되어 “음악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507)경성악우회 회장에 니와 세이자부로오(丹羽淸次郞), 간사에 張德昌 외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강사로 金永煥과 시미즈 칸조오(淸水幹三) 등이 있었다. 또, 정회원은 모두 23명으로 장덕창·柳濤熙·崔虎永 등 세명이었고 나머지 모두는 일본인이었다. 강사 김영환은 경성악우회의 중심인물이었다. 李宥善,≪韓國洋樂百年史≫(중앙대학교출판부, 1976), 164쪽. 그리고 1929년 2월 22일에 창립한 조선가요협회는 일제가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들여 민족정서의 개량책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김영환·김형준·정순철·안기영 등이 참가하여 활동하였다.508)발기동인으로 이광수·주요한·김정식(소월)·변영노·이은상·안석주·김억·양주동·박팔양·김동환·김영환·안기영·김형준·정순철·윤극영 등이 었다. 작곡부는 김영환·김형준·정순철, 선전부는 안기영·안석주·김동환이었다. 한국의 전통음악분야 인사가 없는 것도 이 단체를 통한 일제의 통치선전강화이었다. 당시 신문기사에 한국전통음악인<수심가>·<아리랑타령>·<춘향전>등이 悖歌이고 희망이 없는 淫蕩哀願의 소리(聲)이니 이러한 나쁜 가요를 척결하고, 조선가요협회의 문화운동이야말로 “조선의 신광명이요 신희망”이라고 주장한 것을 보아도 일제의 양악 진영과 전통음악 진영간의 분할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한국 노래의 일본식으로의 개량을 통해 일선융화·내선일체의 신민화를 꾀하려 한 것이었다.

 일제가 아악보존이나 민악의 개량책에 의하여 한국음악을 약체화시키고 있었음에도, 새로운 문화 추구의 열망과 일제의 양악육성책에 고무된 양악계는 1930년 2월 11일 드디어 본격적인 전문가 조직체를 창립하였다. 바로 朝鮮音樂家協會의 창립이었다. 초대이사장에 현제명, 이사에 홍난파·김영환·채동선·안기영 등이었고, 창립발기인으로 현제명·홍난파·김영환·채동선·안기영·최호영·독고선·홍재유·윤성덕·김인식 등이 참여하였다.509)李宥善, 앞의 책, 176쪽. 조선음악가협회는 1926년에 붓츠부인이 지휘자이고 박경호 등 15∼16인의 단원으로 구성된 中央樂友會과는 규모나 수준에서 달랐다. 조선음악가협회는 30년대 음악계를 주도하고, 40년대초 일제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와 같이 많은 영향을 미친 조직체였다.

 1930년 카프계열의 신고송과 민족계열의 홍난파간의 ‘음악의 계급의식’을 둘러싼 대논쟁으로 음악계는 분열되기 시작하였다.510)사회적인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양찬준·엄흥섭·신고송 등이 1930년 8월에≪음악과 시≫제1호 창간호를 내면서 프로음악운동을 본격화 시킨다. 여기에 신고송의<음악과 대중>에 대한 내용으로 홍난파가≪동아일보≫, 1930년 1월 29·30·31일·2월 1일 등 4회에 걸쳐<음악과 계급의식>이란 논제로 신고송을 비판하자, 신고송은 같은 신문 3월 12·13일로<음악의 계급의식에 대하여-홍난파씨의 논을 반박함>으로 반비판을 제기하자, 홍난파는 3월 17∼24일까지 8회에 걸쳐 같은 신문에<음악의 계급의식에 대하여-신고송씨의 반박에 답함>이란 논제로 재비판이 지속되었다. 노동은,<30년대, 카프음악운동>(앞의 책, 1989), 171∼176쪽. 일제강점하의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전개된 이 논쟁은 그 내용의 평가를 떠나서, 음악계 여론분열을 노린 일제의 분열정책의 결과였다. 이후 민족개량운동에 앞장선 홍난파를 경성방송국 경성방송국 산하의 경성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조선음악협회 평의원으로 선임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511)홍난파의 친일행적에 관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것.
노동은,<우리역사쓰기, 참인가, 거짓인가?>(≪노동은의 두번째 음악상자≫, 한국학술정보, 2001), 130∼150쪽.
―――,<홍난파-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친일파 99인≫3, 도서출판 돌베개, 1993), 109∼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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