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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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서화협회와 조선미술전람회

2) 서화협회와 조선미술전람회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고희동은 신진들을 위한 미술교육에 임하는 한편 근대적 성격의 화단의 형성에도 힘을 쏟았다. 안중식을 회장으로 고희동 자신은 총무로 창설된 서화협회는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단체이자 근대적 의미의 화단의 출현을 의미한다. “신구서화계의 발전,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의 교육 내지 公衆의 高趣雅想을 증장케 함을 목적”539)≪서화협회보≫(1921).으로 내세운 서화협회는 구체적인 사업으로 휘호회, 전람회, 의촉 제작, 도서 인행, 강습소를 개설을 계획하였다. 전시·출판·교육 등 광범한 영역에 걸친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시대적인 사명 의식하에 최초의 근대적 미술활동을 점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화협회의 본격적 활동은 협회가 창설되고 3년만에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창설직후인 1919년 3·1운동의 발발과 회장 안중식의 서거, 20년에는 2대 회장인 조석진의 잇따른 죽음으로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21년이다. 서화협회전이 열리자 이에 자극 받은 조선총독부가 문화회유정책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1922년 출범시킴으로써 본격적인 미술전시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서화협회전은 순수한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단체이자 동인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조선미술전람회는 초대와 아울러 신인등용의 공모전으로서의 체제를 띠고 있었다. 대립된 양상을 보이던 두 전시는 3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화협회전의 위축과 조선미술전람회의 괄목할 성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단체의 성격과 회원전에 머물렀던 서화협회전에 비해 조선미술전람회는 한국인과 아울러 당시 한국에 체류했던 일본인 서화가들도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공모전이었기 때문에 규모와 활기가 있었다. 초기엔 총독부 주최의 전시라고 기피했던 한국인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도가 높아졌을 뿐 아니라 권위 있는 신인등용문으로 인식되었다. 단순한 그룹전과 官展의 차이라고 하겠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동양화부·서양화부·書部의 3부를 두고 초대형식과 공모형식을 취하고 있다. 1932년에 가서 서부가 폐지되고 공예부가 신설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 경부터는 새롭게 추천작가제가 도입되어 연속 4회 특선의 경우는 추천작가로서 초대되었다. 서부가 폐지된 것은 서예가 교양이지 예술형식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예술형식으로서 보다 살롱형식에 걸맞지 않다는 시대적 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다.

 전통회화양식을 동양화로 공식 천명한 것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였다. 이전에도 동양화란 명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540)번영로,<동양화론>(≪동아일보≫, 1920년 7월 7일). 공식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동양화란 서양화에 대한 상대적인 명칭으로 서양화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단순히 서화란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1918년 최초의 미술단체 명칭이 서화협회인 것을 감안한다면 10년대엔 서화란 명칭이 보편화되었고 극히 일부에서 미술이니 동양화니 하는 명칭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서화란 명칭은 서예와 회화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다. ‘서’와 ‘화’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관념의 산물이다. 동양화란 명칭의 공식적인 사용은 대비적인 양식으로서 서양화가 보급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서’에서 분리된 독자적인 회화의 모습으로 정체성을 확립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화니 한국화니 조선화니 하는 주체적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후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또 한편 동양화란 명칭은 전통적인 회화양식의 살롱예술로서의 탈바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적 양식으로서의 자각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동양화의 소재나 방법이 전래의 관념적인 내용에서 벗어나 현실추구의 리얼리즘에 경도되고 있음에서 변화의 내역을 읽을 수 있다. 리얼리즘으로의 경사는 주변의 산천을 모티브로한 寫景山水의 급증을 가져왔으며 비근한 일상에서 취재된 현실적 내용이 증가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리얼리즘에의 경도는 전반적인 시대적 추세이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 일본화의 감각적인 현실인식의 방법에서도 많은 감화를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몽롱체와 도안풍의 채색기법은 가장 직접적인 일본화의 영향으로 해방 후 왜색의 탈피가 주요 논의로 떠올랐을 때도 주로 채색화의 기법적인 문제가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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