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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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미술
  • 3) 서양화의 정착과 새로운 모색

3) 서양화의 정착과 새로운 모색

 주로 일본 동경에 유학한 서양화 지망생들은 당시 일본의 서양화, 즉 그들 나름으로 해석된 서양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1920·30년대를 통해 일부 화가들이 서양에 유학했으나 국내에서의 이들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을 뿐이다. 당시 일본화단은 절충적 인상파를 아카데미즘으로 정착시켜가던 무렵으로 한국의 서양화 지망생들이 접한 것도 이 같은 절충적 양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1920년대까지는 단순한 새로운 회화방법으로 서양화를 익히는 습작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개성적인 자기 세계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 같은 습작의 단계를 지난 30년대에 와서 였다. 그런 과정에서도 김관호와 나혜석 등의 출현은 예외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동경미술학교 卒業展에 최우등을 차지한 김관호의<해질 녁>은 같은 해 일본의 관전인 文展에서도 특선을 차지하고 천재적인 면모를 아낌없이 발휘했다.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여성의 권익 신장에 앞장 선 신여성의 대표격인 나혜석은 최초의 여류화가로서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초기에는 인상파풍을 답습하였으나 세계일주 이후는 야수 표현파풍의 경향을 섭렵했다.

 서양화단은 습작기라 할 수 있는 1920년대를 지나면서 다양한 내면을 형성해 가는 활기를 보이고 있다. 개성적인 작풍을 구사하는 미술가들의 등장과 조형 이념에 의한 결속체로서의 그룹의 출현이 1930년대로 진입하면서 왕성한 면모로 나타나고 있다. 金仁承·沈亨求 등 동경미술학교 출신들에 의한 아카데미즘이 조선미술전람회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가하면 金鍾泰·金重鉉 등의 독학파에 의한 독창적인 화풍이 신선한 경향으로 각광을 받았다. 일본적인 감성에 의한 인상파를 탈피, 한국의 자연에 상응되는 본격적인 인상파를 주장하고 구가해 보였던 吳之湖·金周經 등의 존재도 1930년대 서양화단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인상파풍의 감각적인 기법에 도시적인 세련을 가미한 李仁星의 존재 역시 30년대 가장 뛰어난 작가로 기억된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통해 해외에 유학한 서양화가로 대표적인 사람은 李鍾禹·任用璉·白南舜·鮮于膽·裵雲成으로 이 가운데서도 이종우는 프랑스 유학 중 본격적인 고전풍의 작풍을 습득하여 절충적 인상파로 대변되는 당시 서양화단에 이채로운 존재로서 돋보였다. 대상을 해부학적으로 描破해 들어간 그의 고전적 화풍은 본격적인 서양화의 일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전반에 걸쳐 두드러진 그룹의 출현은 이념의 결속체라는 그룹 본연의 속성을 떠나서도 미술가 사회라는 화단 형성을 더욱 구체화시켜 간 현상으로 주목된다. 1927년 金昌燮·安碩柱·金復鎭·林學善·申用雨·李承萬 등에 의한 蒼光會, 1928년 沈英燮·張錫豹·朴廣鎭 등의 綠鄕會, 1930년 具本雄·李馬銅·吉鎭燮·金應璡 등의 白蠻洋畵會, 1932년 재동경미술학우회인 白牛會, 1934년 李昞圭·구본웅·孔鎭衡·임용연·申鴻休·宋秉敦·黃述祚·이마동·張勃·金瑢俊·이종우 등의 牧日會 등이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에 걸쳐 등장한 그룹들이다.

 이들 그룹들은 당시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한 미술의 제도적·권위적 추세에 반발, 보다 자유롭게 창작의 풍토를 진작시키자는 의욕을 지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1930년대는 이념적으로나 방법적으로 새로운 기류가 활발히 만연되어 갔던 시대로 특징지어 진다. 이념적 결속으로서의 그룹의 연이은 출현과 새로운 경향의 모색이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절충적 인상파풍에서 벗어나 후기인상파에서 비롯되는 개성적·주관적 미술사조가 30년대 후반의 시대적 특징을 반영해 주고 있다.

 후기인상파에 이어지는 야수파·표현파·미래파·구성파·추상파·초현실주의 등 이른바 신감각으로 통칭되는 새로운 경향은 주로 일본에 체류하거나 유학중이었던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구되었다. 서울화단에선 아직도 이 같은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엔 문화적 풍토가 마련되지 못했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부터 왕성하게 전재되는 아방가르드운동은 그 무대가 일본의 동경화단이었다. 당시 일본의 전위적 단체로는 二科會·獨立展·新制作派·自由展·美術文化展 등으로 이들 재야전에 참여했던 한국인으로는 구본웅·길진섭·文學洙·金煥基·李仲燮·劉永國·李揆祥·宋惠秀·李快大·金宗燦·崔載德·金晩炯·金夏建 등이었다.

 새로운 감각의 추구와 더불어 1930년대는 향토색에 대한 관심과 천착이 활발했다. 주로 풍속적인 단면을 소재화한 작품이 급증하고 있다. 이에 곁들여 우리의 고유한 미의식에 대한 미학적 조명이 활발히 전개되어지고 있다. 향토색에 대한 관심은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보편적인 의식을 바탕에 깔면서도 우리 고유한 미의식에 대한 자각 현상이라는 긍정적인 견해와 일본인의 이국 취미에 결부된 감상적·퇴조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30년대는 민족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시대로 향토적 소재에의 천착도 이 같은 시대적 추세로 간주할 수 있는 반면,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의 일본인 심사원들이 그들과 다른 이국적 소재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이에 부응하려는 태세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공존하고 있다. 녹향회가 주장했던 초록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건강한 자주의식이 있는 반면, 이국 취미에 결탁된 얄팍한 감상주의도 배재할 수 없다.

 우리 미에 대한 연구는 먼저 일본인 민속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에 이어 高裕燮·金瑢俊·尹喜淳 등에 의해 우리 미의 성격규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순후한 아름다움, 무기교의 기교 등 우리 미의 특징이 이들에 의해 규명되었다. 고유한 미의식에 대한 자각현상은 피폐해져 가는 한국인의 정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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