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3. 미술
  • 4) 근대적 성격의 조각

4) 근대적 성격의 조각

 회화에 있어선 전통적인 양식과 외래적인 양식이 공존하는 반면, 조각에 있어선 이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없다. 전통적 회화양식을 동양화로, 서양에서 이입된 양식을 서양화 내지 양화로 부르는 현상은 비단 회화에 국한되지 않고 衣食住의 樣式에까지 미치고 있다. 예컨대, 재래의 건축양식을 한옥이라고 부르는 반면, 서양식 건축양식을 양옥으로 부르고, 전통적 음식을 한식이라고 부르는 반면 서양식 음식을 양식으로, 전통적 의상을 한복으로 부르는 반면 서양식 의상을 양복 내지 양장이라고 부르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에서는 이 같은 상대적 명칭이 있지 않다. 요인은 서구에서 이입된 서양식 조각에 대한 전통적 양식의 조각이 없었다 점이다.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뛰어난 전통을 이어온 조각이 계승되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책적인 불교탄압에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조각 예술을 꽃피웠던 불교문화가 쇠퇴하면서 조각의 전통이 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 조각 예술이 영락해간 요인은 회화가 순수한 감상의 품목인데 반해 조각은 순수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불상은 예배의 대상이지 감상의 품목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근대 조각은 서구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으로 서구식 조소의 방법을 수학한 사람은 1919년 동경미술학교 조소과에 입학한 金復鎭이었다. 고희동이 서양화를 수학하기 위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때로부터 10년 뒤의 일이었다. 비교적 서양화의 지망생이 급증하는 반면 조각은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극히 한정된 수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조각 예술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수요의 문제에 기인된 것 같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조각부가 따로 설정되지 못하고 서양화부 아니면 공예부에 속했던 요인도 수적인 열세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6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고희동에 의해 많은 서양화 지망생들이 배출된 것과 같이 조각 역시 김복진에 의해 많은 문하생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동경에 유학했고 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였다. 해방전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가들은 梁熙文·張基男·安奎應·文錫五·林淳茂·洪淳慶·李炳三·金斗一·李國銓·曺奎奉·金景承·尹承旭·尹孝重 등이다.

 조각의 방법은 刻을 위주로 하는 목조·석조와, 떠내는 방식의 塑造로 석고·브론즈를 들 수 있다. 당시 동경미술학교에선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목각조각을 내세우는 한편 서구식 방법으로 소조를 내세웠다. 한국의 조각 지망생들의 대부분은 서양의 방법에 경도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의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조각작품의 내용은 소조에 의한 두상 정도가 대부분으로 아직도 습작의 단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복진을 비롯한 윤효중·윤승욱·김경승·이국전 등의 전신상이 등장함으로써 본격적인 국면에 이입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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