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Ⅴ. 과학과 예술
  • 5. 연극·영화
  • 1) 1910년대-전통극과 신파극

1) 1910년대-전통극과 신파극

 우리의 근대문화는 매우 불행한 상황 속에서 성장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근대문화가 꽃필 수 있는 20세기에 일제의 억압과 이념적 분열·전쟁·혁명·군사독재로 점철된 속에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과 영화만 하더라도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큰 틀 속에서 저항과 회피를 주된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연극과 영화가 목적성을 띤 이념성의 경직된 방향으로 흐르게끔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순수 예술을 추구한 지식인들은 연극과 영화를 항거의 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강했고, 대중예술을 추구한 이들은 현실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저급한 오락성만을 추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연극과 영화가 양극단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보편성에서 뒤지고 따라서 걸작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측면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연극과 영화에 대한 시야를 비좁게 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1910년대 이후의 우리 연극은 일본에서 흘러 들어온 신파극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온 전통극, 이를테면 판소리라든가 거기서 분화된 창극·가면극·굿놀이·꼭두각시극·재담극, 그리고 민속무용과 민요 등이 한 무대에서 엮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에서 발생하여 한국침략 과정에서 묻어 들어온 신파극이 새로운 연극양식으로 대중에 어필했지만 한국 대중에 익숙한 전통극 역시 신파극 못지 않은 세력으로 몇 개 되지 않는 극장을 석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1910년대 초 서울에는 연극을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극장이 光武臺·團成社·長安社·演興社 정도 있었는데, 연흥사 한 곳에서만 신파극이 공연된 반면에 나머지 세 곳 극장에서는 우리 고유의 전통극만 매일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광무대 등 세 극장무대에서 1년 열두 달 거의 쉬지 않고 전통극을 공연했는데, 그 내용은 전술한 바 있듯이 판소리·민요·굿놀이·가면극·인형극·재담극 그리고 국악연주 등이었다.

 전통극을 주도한 사람들은 李東伯 등과 같은 판소리 명창과 朴春載 일행, 그리고 기생이었다. 그 중에서도 남성보다는 여성 演戱者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는데 당시대에는 券番이라는 종합 국악예술학교와 같은 양성기관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울에만도 한성권번, 大同券番 등 네 개나 있었고 평양·부산·광주·인천 등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진주·목포 등 웬만한 중소도시들에도 권번은 반드시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유럽의 콘서바토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시에는 기생도 예술활동만 하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가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전국에 2,000여 명 가까이 되었다. 그만큼 권번이란 것은 예술학원 성격의 한국적 콘서바토리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극은 인적 자원이 풍부했는데 다만 레퍼토리가 단조로웠던 점이 하나의 취약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통공연예술은 유산이 뻔한 것이고 새로운 창작이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일 밤 관중이 광무대·단성사의 객석을 메웠던 것은 唱과 춤 등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특히 간과해서는 안될 주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다름아닌 朴承弼이었다. 그는 극장경영자에 불과했지만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해서 광무대와 단성사를 전통극 전문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그 시대에 박승필이 없었다면 전통극의 명맥이 과연 이어졌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반면에 일본침략 과정에서 묻어 들어온 신파극이 시작된 것은 1911년 초겨울이었다. 19세기말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3만여 명이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부산·목포 등 항구도시에 정착했다. 주로 군인·경찰 등 관리와 상인들이 정착하면서 그들 자신을 위한 극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대체로 1907년경부터였다. 서울에만도 京城座·御成座·壽座 등이 문을 열었고 일본 교토·오사카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파극단들이 재한 일본인을 위한 공연을 갖곤 했다.

 거기서 어깨너머로 신파극을 배운 林聖九가 젊은 동료를 모아 혁신단이라는 최초의 신파극단을 만든 것이 1911년 초겨울이었다. 이들이<불효천벌>이라는 작품을 어성좌에서 공연한 것이 1911년 12월이었는데, 이것이 한국신파극 더 나아가 신극의 효시였다. 당시 관중은 재래의 전통극과 전혀 다른 신파극을 보고 신기함을 느꼈지만 초기에는 거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파극에 익숙해진 관중이 그것을 즐겨 감상했다. 신파극이 조금씩 인기를 끌면서 그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배우와 제작자들이 늘어났고 극단도 몇 개 더 생겨났는데, 이를테면 李基世 주도의 유일단이라든가, 尹白南·趙一齋 주도의 文秀星 등이 그런 유형의 단체였다. 그 외에도 몇 개의 신파극단이 부침했지만 역시 1910년대 신파극을 주도한 인물은 임성구·이기세·윤백남 등이었고 金陶山이라든가 金小浪·高秀喆 등이 배우와 극단 리더로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신파극의 레퍼토리와 연극방식은 일본 신파를 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고, 나름대로 설정한 목표라고 한다면 권선징악·盡忠竭力·민지개발·풍속개량 등의 일종의 계몽성을 띤 것이라 하겠다. 신파극이 전통극보다는 신선했기 때문에 관객이 몰리기도 했지만 인기 레퍼토리라 할<장한몽>이라든가<쌍옥루>·<처>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작품이 일본 것을 번안한 것이기 때문에 涕淚性 짙은 감상물로서 한국관객의 정서에는 들어맞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때는 전통극과 신파극이 연합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상대방의 인기를 공유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체질이 다른 연극양식이 융화하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영화의 인기에 대항한다고 했지만 두 양식의 연극은 곧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1910년대는 영화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었다. 1903년에 동대문 밖 경성전기회사 창고의 한 귀퉁이에서 영미연초회사의 담배광고용으로 돌리기 시작한 활동사진이 1910년대 와서는 제법 좋은 극영화까지 수입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가령 무성영화이긴 했지만<쿼바디스>(1911)를 비롯하여<폼페이 최후의 날>·<나폴레옹 일대기>·<맥베스>등은 대중의 흥미를 끌고도 남음이 있었다. 신파극 관객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자 신파연극인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영화를 끌어들여서 소위 連鎖劇, 즉 키노드라마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첫 번째 작품이 1919년 10월 단성사 무대에 올려진 김도산의<義理的 仇鬪>였다. 연쇄극은 배우들이 무대에서 실연을 하는 사이사이 표현이 어려운 장면들을 영사막에 비추는 방식을 말한다. 연극인들에게 있어서는 연쇄극이 기발한 연극형식으로 비쳐졌는지 몰라도 식자층으로부터는 은그릇에 설렁탕을 담은 것에 비유될 정도로 신파극의 타락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저급한 대중에게는 그런대로 연쇄극이 먹혔기 때문에 1930년대 후반까지도 그런 연극형식이 이따금 무대에 올려진 바 있었다. 다만 한국 영화사 측면에서 보면<의리적 구투>가 창작극영화의 단초가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