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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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1940년대-연극·영화의 암흑기

4) 1940년대-연극·영화의 암흑기

 1940년대 들어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이 크게 달라지면서 연극과 영화도 전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즉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확대해 갔고 그 연장선상에서 진주만까지 폭격함으로써 세계대전으로 번져갔는데, 그 시점에서 저들이 시급하게 느낀 것은 문화와 지식인에 대한 통제였다. 저들이 극연좌를 해산한 것이라든가 내선일체니 인고단련이니 하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도 그 시기였으며≪조선일보≫와≪동아일보≫를 폐간시킨 것도 그때였다.

 그 시기에 일본내에서도 문화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있었으며 소위 국민연극이라는 것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국민연극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나치스의 국책연극을 모방한 것으로서 연극을 통해 일본정신을 구현하고 정책목표를 긍정적 측면에서 선양토록 한 것이다. 그런 국책극을 이 땅에 그대로 전수시키기에 앞서서 일제는 大和塾이라는 것을 두고 지식인을 묶었으며 1940년 말에는 조선연극협회도 조직케 했다. 이 때 앞장섰던 이서구·金寬洙 등은 조선 총독부의 조종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구상했고, 유치진 등 순수 열정파들은 총독부의 속내도 모르고 연극인 양성, 순회공연 등을 주요 사업으로 내걸기도 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순전히 전시체제를 강화시키는 국책극만을 강요한 것이다. 물론 그런 연극을 강요한 총독부가 연극인들에게 특혜도 주기는 했다. 연극인들이 궁핍했던 그 시기에 쌀이라든가 설탕, 구두같은 것을 배급받고 기차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가장 신나했던 이들은 흥행극을 전문으로 하는 연극인들이었고, 지식 연극인들은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총독부는 유치진·서항석 등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현대극장을 창단케 했던 것이다. 현대극장이 국민연극시대의 기수가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당시 연극계의 리더였던 유치진은 현대극장을 이끌면서<흑룡강>·<北進隊>·<대추나무>등 친일 목적극을 썼고 함세덕은 마그셸 빠뇰 원작의<마리우스>과<화니>를 일제의 남진정책을 찬양하는 목적극으로 번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연극협회도 1941년에는 조선연예협회까지 끌어들여서 조선연극문화협회로 개편되면서 산하에 극단 13개, 악극단 8개, 창극단 3개, 곡마단 9개, 이동극단 2개, 만담반 1개 등 36개 단체를 산하에 거느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 회원수는 남자 540명, 여자 380명, 그리고 보조원 10명 등 모두 930명이나 되었다. 이 말은 당시 무대공연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공연예술인이 거의 1,000여 명에 달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正劇으로 또는 창극이나 악극으로, 그리고 만담을 통해서 일제의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인텔리 극단은 현대극장과 高協 정도이고 나머지는 흥행극 단체들이었다. 특히 1940년대에는 동양극장에서 세련된 창극과 악극계통의 단체들이 많은 관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만큼 대중은 정극보다 노래와 춤이 곁들인 가무극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하튼 조선총독부가 연극문화협회를 장악한 뒤에 마치 연극을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 국책극을 하도록 했는데, 연극인들은 총독부의 저의를 간파하고 그것을 역이용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그런 대표적 행사가 1942년 초가을부터 시작된 연극경연대회였다. 제1회 대회에는 현대극장 등 5개가 참가했는데 단체상은 아랑과 고협이 차지했고, 제2회 대회때는 일어극 공연도 포함시켰다. 이는 저들의 저의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연극경연대회 말고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추진했던 사업으로 이동극장운동이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공연이 서울 등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고, 지방 특히 농어촌에 사는 사람들은 연극을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국책극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동극장운동을 확산시킨 것이었다. 이 운동이야말로 연극문화협회가 추진한 사업 중에서 가장 성과를 거둔 경우였다.

 그런데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창극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여성 배우들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창을 부를 수 있는 젊은 기생들을 일제가 정신대로 끌고 간 데 따른 것이다. 이 시기에 친일어용극, 특히 일본어연극까지 강요하는 일제에 항거하여 연극계를 떠난 연극인도 몇 명 있었다. 가령 동양극장 연출을 전담하다시피 했던 박 진과 동양극장의 실질적 운영자였던 崔獨鵑이 바로 그런 몇 안되는 연극인이었다.

 이 시기의 영화도 연극 이상으로 하나의 암흑기였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총독부가 영화분야도 공연예술분야처럼 하나로 묶기는 마찬가지였다. 즉 조선총독부는 1940년 정월에<조선영화령>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전국의 영화사를 모두 해체시키고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영화인들에게 친일어용영화를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나온 작품들이<승리의 뜰>(方漢俊 감독),<지원병>(安夕影 감독),<반도의 봄>(李炳逸 감독) 등이었는데, 이들은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청년들이 군에 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수선화>와 같은 멜로물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부분의 영화는 목적성을 띤 어용영화였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이 시기에는 또 일본인 감독들도 몇 명 내한해서 우리 배우들을 데리고 어용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일제의 한국병탄 이후 해방될 때까지의 36년 동안은 공연예술과 영상예술은 커다란 암흑기였다. 그런데 그 기간이야말로 우리의 근대극과 영화가 생성되고 발전하는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압제라는 너무나 열악한 시대상황이 펼쳐졌던 관계로 연극 영화가 제대로 뻗질 못하고 비틀리고 왜곡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정치·경제만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도 험난한 도정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저항하고 또 순응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柳敏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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