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1. 민속
  • 3) 가족과 친족

3) 가족과 친족

 융희 3년(1909) 3월에 제정된<民籍法>(내부훈령 제39호)에 의하여<호구조사규칙>이 폐지됨으로써 전통적인 호적제도를 대신하여 일제식 호적제도가 강제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르면 호주는 家의 주재자가 되어 출생·사망·호주변경·혼인·이혼·입양·파양·분가·이거 등의 변동사항에 대해서 발생일로부터 10일 이내에 본적지 관할 면장에게 신고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다.638)朴秉濠,<일제시대의 호적제도>(≪고문서연구≫3, 한국고문서학회, 1992), 86쪽. 이후 총독부에서는 1912년에 민법에 관한 기본법령을 만들었고 1914년에는 개정한<일본호적법>을 모체로 하여 1921년 12월 18일에<조선호적령>을 공포하였으며 1923년 7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하였다. 1939년에는<氏選定制限 및 氏名變更에 관한 制令>으로 창씨개명을 강행하였는데, 이는 이미 1915년의<민적법>개정을 통해서도 나타났듯이 일제가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본식 가족제도를 심으려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농촌에서는 일제 자본주의에 편입되면서 생산단위로서의 가족이 해체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많은 농민들이 농업생산만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자 가족의 일부는 농업 이외의 부문에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다. 도시의 공업화는 농촌가족의 일부 또는 전체를 도시로 끌어들였다. 일정지역에서의 累代에 걸친 分家를 통해 이룩해온 대가족제도의 틀은 이와 같은 가족에서의 역할 분화와 더불어 개인주의 및 남녀평등의식을 담은 외래문화의 영향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성씨는 세대주의 성을 기준으로 1930년에 행한 국세조사자료에 의하면 250개의 성이 있었고 호적부에 나타난 성은 326개의 성인데 국세조사에만 나타난 성이 15개여서 모두 341개의 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는 앞서 언급한 대로 1920년∼30년대에 많이 발간되었는데, 제작 때 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실린 내용에 대해서는 관청으로부터 검사를 받았다.

 가족 및 친족을 단위로 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는 관혼상제로 일컬어지는 가례다. 그러나 이것은 ‘舊習打破運動’의 주 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전통의례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도 생겨났다.

 관혼상제의 四禮 중 관례는<단발령>시행으로 가장 먼저 쇠퇴한 의례다. 그러나 반드시 상투를 틀지 않더라도 성년식으로서의 의미를 살려 혼례식 전에 관례를 행함으로써 그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식 혼례는 기독교의 전파에 따라 예배당에서의 결혼식으로 확산되었다. 전통 혼례가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구습으로 평가되는 가운데 신식 혼례가 유행하자 결혼전문예식장이 등장하였으며 혼례복을 빌려주는 가게와 신부화장을 전문으로 하는 미장원도 생겨났다.639)고영진,<관혼상제, 어떻게 변했나>(≪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1, 역사비평사, 1998), 275쪽. 그러나 이것은 주로 도시에서의 추세였고 농촌에서는 여전히 전통 혼례가 행해졌다. 단지 경제적인 사정으로 신부집의 부담을 덜기 위해 지역 용어로 ‘당일치기’라고 하여 신부집에서 초례를 한 후 바로 신랑집으로 오거나 아니면 ‘싸오는’ 혼사라고 하여 신랑집에서 혼례식을 갖는 등의 변형이 나타났다. 청년회가 조직된 어떤 마을에서는 신행 당일 저녁에 미혼의 동네 청년들이 신랑에게 선물도 주고 축가도 부르는 등의 축하행사를 가졌다고 하는데, 이는 전통혼례절차에는 없는 새로운 민속이라고 할 수 있다.

 1912년에 총독부령으로 24개 조의<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이 제정되었는데 개인묘지보다는 공동묘지를 권장하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1934년에 총독부가 제정한<의례준칙>은 장사기간을 5일에서 14일 사이로 하고 상복을 입는 기간은 30일로 정하였으며 제사는 기제사와 묘제사만 허락하고 기제는 2대까지로 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잘 시행되지 못했고 또 강제력도 갖지 못하였다. 1940년에는<묘지규칙>을 개정하여 埋葬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어 火葬을 유도하였다. 매장 및 매장지에 대한 규제와 통제로 공동묘지의 조성은 더욱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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