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1. 민속
  • 4) 촌락과 향촌사회

4) 촌락과 향촌사회

 갑오경장 등 일제 이전에 행해졌던 제도의 개혁과 이어 국권상실 속에서 식민지적 특성을 반영하는 각종 제도의 시행으로 봉건적인 반상의 신분관계는 더 이상 그 틀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여 특히 농촌지역에서는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 후 6·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과거의 반상은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02년 강원도 간성군에서 백정들이 마을공동소유의 상여를 빌리려다 거절당한 사건이 단초가 되었으나 192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백정들의 전국적인 신분해방운동이 시작된 것처럼 뿌리깊은 신분적 관계와 의식은 쉽사리 제거되지 않았다. 일제가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에 신분을 명기하도록 함으로써 봉건적 지배관계를 온존하는 정책을 써온 것도 그 잔존에 일조하였다. 백정들이 조직한 형평사는 이후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제휴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성격도 갖게 되었다.

 조선시기의 촌락자치제도인 향약도 일제에 들어와서 대부분 폐지되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면사무소의 설립과 함께 面約이라는 축소된 형태로 시행되었다. 일제 때 면의 協議員은 면장과 함께 면의 일을 상의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각 면에 17∼18명을 두었으며 임기는 3년이었다. 협의원은 재산이 넉넉한 자라야 될 수 있어서 주로 지주들이 이 직책을 맡았다. 면장은 조선인이었던 반면 면 지서의 주임은 일본인이 맡았다.

 농촌 마을에서는 어려운 경제사정을 반영하듯 殖利의 성격을 갖는 계가 유행하였다. 위친계나 상여계 등 친목계인 경우에도 결국은 식리가 주된 목적이 되었다. 주로 겨울철에 한번 계모임을 갖는데, 계를 타는 사람은 돈을 내지 못한 계원의 집에 찾아가 볏섬도 가져오고 솥단지도 뺏어오는 등 오히려 친목을 해치고 계원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일들이 잦았다. 서로 돈을 빌어 곗돈을 마련하다 보면 계모임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가 빚쟁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草鞋契’라고 하여 계원들이 농한기를 이용한 공동생산과 판매로써 번 수익금을 식리계를 통해 운영하여 어려운 경제난을 헤쳐나가기도 하고 주식회사로까지 발전시킨 사례도 있었다.

 마을마다 자생적이지 않은 여러 가지 단체를 가지게 된 것도 일제시기의 한 특징이다. 앞서 사례로 든 부곡리의 1930년대 마을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용\단체 振興會 부인회 訓練共勵組合 納稅組合 捕見組合
단체의 수 2 1 2 2 1
설립년도 1932 1932 1936 1918 1934
목적 농촌진흥 부인의 노동 농가경제 갱생 洞里 일반회계 養殖
회원수 125명 25명 42명 全 洞民 595명
재산 및 적립금       150円 70円

<표 1>1930년대 한 마을의 단체 현황

≪1936年 富谷里タ勢一班≫참조.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일기≪紀語≫의 기사(1925년 1월 27일)를 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洞會에서 태벌을 하는 등 농촌에서는 여전히 이전시기에 있었던 자치적인 촌락생활의 모습들도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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