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1. 민속
  • 6) 세시풍속, 예능 및 설화

6) 세시풍속, 예능 및 설화

 우리 나라는 1896년부터 양력 사용이 공식화되고 관청·학교·교회 등에서 이를 따랐다. 그러나 설·단오·추석 등 고유의 명절과 조상제사일, 그리고 장날이 모두 음력체계로 움직였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그리고 특히 농촌생활에서는 양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일제는 우선 음력설을 자신들처럼 양력설로 바꾸기 위해 고유의 설날을 舊正으로, 양력 1월 1일을 新正으로 부르게 하였다. 또한 설 무렵에 떡방앗간 폐쇄하기, 설날 아이들이 입고 나오는 새옷에 먹칠하기, 왜식 설, 즉 양력 1월 1일에 시메나와(標繩)라고 하여 새끼에 귤을 꿰어 대문에 달기 등 갖은 방법을 써서 양력설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력을 기준으로 행해지던 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세시풍속을 양력체계로 고칠 수는 없었다.

 일제의 통제를 가장 많이 받은 세시풍속 중 대표적인 것은 石戰과 광역 단위의 줄다리기다. 둘 다 많은 군중이 일시에 한 장소에 모이는 대규모 집단놀이로서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행사로 여겨 처음에는 일인 헌병 또는 경찰들의 감시 속에서 행해지다가 나중에는 행사 자체를 못하게 하였다.

 기독교의 전파로 인한 세시풍속의 변화는 일제의 통제와는 달리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서도 사고방식에서부터 복식 등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와 같은 기독교문화의 영향력의 이면에는 일제와는 달리 직접적인 식민지배력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문화·교육·의료 등의 비정치적 분야로 침투하려는 미국 자본의 관심과 전략이 있었다. 특히 기독교식 생활방식은 일년을 단위로 하는 농촌의 생활양식과는 달리 일주일을 단위로 공휴일을 갖는 도시생활과 맞아 도시에서 생활개념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라진 풍속을 대신하여 새로운 풍속도 형성되었다. 서당을 대신한 국민학교에는 운동장이 설치되어 있어 지역사회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운동회로 학부모 및 학교 인근 주민들이 참여하여 지역행사의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그 내용에는 씨름·줄다리기 등 전통의 놀이들이 포함되었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부활절·추수감사절·크리스마스 등도 새로운 세시풍속으로 확산되었다.

 일기≪紀語≫의 다음 기사들을 통해 일제하 농촌의 세시풍속 현황을 살펴본다.

씨름판:16일 밤 우리면 長市橋에서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며 순사가 씨름을 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과 싸움이 붙었고 씨름을 못하게 하자 모인 사람들과 투석전까지 벌어졌다고 한다(≪紀語≫, 1920년 8월 16일).

줄다리기:온 군이 힘을 다해 羊腹坪 모래사장에다 索戰場을 설치했다는 말이 들린다(≪紀語≫, 1934년 1월 11일).

달집놀이:아이들이 전래에 따라 달이 떠오를 때 月家(달집)를 만들어 불에 태워 한 해의 흉풍을 점친다. 이는 옛날부터 농가에 전해져온 것이다(≪紀語≫, 1936년 1월 15일).

 券番은 일제 때 만들어진 妓生組合이다. 기생을 가르쳐왔던 敎坊이 없어지고 이를 대신하여 흩어진 官妓들을 모아 서울에 新彰組合과 廣橋組合이 설립되는데, 이것이 권번의 시초다. 권번은 전국의 주요 도시마다 설치되었는데 童妓를 교육하기 위한 기생학교를 부설로 두었다. 과거 지방의 기녀들처럼 지방 권번에서 교습을 마치면 일부는 권번의 책임자나 유력자의 주선으로 서울 권번에 입적하였다. 예능을 담당했던 과거 기생들이 그랬듯이 권번도 농촌의 일반 농민들의 삶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또한 유성기와 같은 새로운 오락기계들은 시골 농민들로서는 장날에 장터에나 나가야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농민들의 예능과 오락을 담당한 전문직업인들은 이전시기와 마찬가지로 사당패나 화랭이패들이었다. 경기도의 경우 화랭이패들은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당골 마을에 들러 우물고사도 하고 가가호호 방문하여 고사도 지내 주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짠지패’라고 불리는 연희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인원편성은 두레 풍물패와 다소 달라 호적 2명, 제금 1명, 장구 1명, 舞童 남녀 각 1명 등으로 꾸며졌다. 이들의 풍물은 두레노동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뛰면서 노는 두레패와는 달리 앉아서 놀았으며 호적을 많이 불었고 춤가락의 비중이 높았다. 설날·대보름·추석 등의 명절이나 마을에 경사가 났을 때 초청을 받아 공연하였으며 수고비를 별도로 받지 않고 술과 음식을 대접받는 것으로 그쳤다. 특히 백중날 이후 두레패가 해체되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연희를 이 집단에 맡기는 마을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 때 만들어진 설화나 전설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아기장사’ 설화다. 아기장사는 태어날 때부터 힘이 세고 어깨에 날개가 달려 선반과 같은 높은 곳도 뛰어오를 수 있는 등 비범한 재주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화를 입을까 염려한 부모에 의해 날개를 잘리고 이후 독신으로 동냥밥을 먹으면서 실패한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나타나는 이 설화의 구성과 내용은 식민시기 민중들의 좌절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암담한 현실을 넘어서게 해 줄 초인적인 존재의 출현에 대한 희망도 담고 있었다.

<鄭勝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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