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2. 의생활
  • 2) 흐름의 대세
  • (1) 의복개량

(1) 의복개량

 개량운동은 모든 생활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각종 집회나 신문·계몽서를 통하여 홍보하고 통보되고 있는데, 주로 “신생활 수립과 구습타파, 의복 개량” 등의 논제를 다루고 있다.

 이 가운데서 우리 옷은 제도의 개선과 폐지론이 거론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생활의 편리성 및 경제적인 측면을 내세우고 있지만, 타인의 이목에 대한 우려도 염려하고 있었다. 생활 개선에 있어서 관혼상제와 색의권장을 주제로 각계 인사들은 “남과 같이 살기 위하여 지금 살림을 고쳐야 한다. 대세를 쫓는 자는 흥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643)≪매일신보≫, 1931년 1월 3·5일.는 현실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여성 복장에 대한 것이 많은데 주로 부인의 머리와 옷에 대해 지적이었다.

 부인복의 결점을 고치는 일은 일본에 있는 동포들도 함께 가세하고 있는데 가슴을 매지 않도록 유방해방을 주장하면서 여학생 옷에는 어깨옷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가운데 물건을 간수할 공간이 없는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주머니 만들기, 폭을 줄이고 자락을 막는 통치마 만들기도 거론되었다.644)≪동아일보≫, 1921년 4월 10일, 9월 11·29일.

 폐지론에서는 長衣폐지가 가장 많이 대두되고 있는데 큰 이유로는 “보행에 지장이 있고, 신체에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장옷이 폐지되면서 周衣가 나오고 있는데 1920년대에는 土産재료 쓰기 및 물산장려와 함께 우리 것과 민족성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선사람은 어찌하면 살꼬, 네 손으로 지은 것을 입어라, 이리해야 살리라, 우리 손으로 지은 것만 입기로 해야 우리 손으로 입을 것을 짓게 된다”645)≪동아일보≫, 1922년 12월 21일, 1923년 1월 1·2일.는 권면도 나오고 있다. “주의를 예복으로 하자”는 주장과 함께 “생리상과 경제적으로 적당하다”646)≪매일신보≫, 1923년 1월 7일.는 장점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반면 개량에 대한 성급한 주장들에 대하여 “朝鮮風을 망각하지 말고, 특색을 무시하지 말라”는 권고와 함께 여자에게 주의가 보급되면서 “개량할 점은 검박보다는 잘 입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내 놓았다. 옷의 색에 대해 어른들의 黑色衣 입기를 강권하면서 “특히 어린아이 것은 형형색색으로 할 것”647)≪동아일보≫, 1921년 9월 14·28·30일, 10월 1일.을 권하고 있다.

 어린이 옷 개량에도 바지의 끈과 대님을 어른의 경우와 같이 폐지할 것을 제기하면서 “손쉬운 개량도 습관이라고 못하고, 귀여운 자제를 병신으로 만들고 있는데 이는 부모가 주의 할 일”648)≪매일신보≫, 1923년 12월 9일.이라는 질책도 함께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학생복 개량에 대한 제안도 보이는데 1924년 “普校생도들의 복장개량도 필요, 위생과 경제적으로 통일시켜야 한다”649)≪매일신보≫, 1924년 10월 5일.는 것이었다.

 개량복의 보급은 실물을 만들어 선보이기도 하였다. 개인연구소에서 고안해 낸 것으로 여성용 개량저고리를 제시하였는데 “부자연한 주름을 없애고 입으면 남자의 양복 웃저고리와 같이 반듯한 게 특색”650)≪매일신보≫, 1932년 11월 17일.이라고 하였다. 의복개량은 1930년대부터는 색과 옷의 형태 외에 옷에 고름 대신에 단추를 달아 입으면 물질과 노력의 경제라고 강조하면서 대님 폐지, 끈을 단추로, 세탁과 풀먹이는 일 폐지, 솜 폐지651)≪매일신보≫, 1931년 1월 16일, 1933년 1월 3·7·8·10일.등 매우 구체적인 부분까지도 강조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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