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2. 의생활
  • 3) 변화의 양상
  • (2) 의복

(2) 의복

 1900년에 단행된 관리복식의 양복화와 함께 일반인도 서서히 그 시류에 따르게 되어 한복과 양복의 이중구조가 나타난다. 이중구조는 평상시 한복생활을 하는 사람과, 한복과 양복을 겸용하는 사람으로 가름되었다. 전자는 주로 시골사람이나 노인층이고, 후자는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거나 학생이었다.

 양복화는 1900년 초부터 재봉기계가 도입되고, 1914년에는 裁縫여학교가 신설되면서678)≪매일신보≫, 1914년 7월 24일. 가속화하였다. 이와 함께 일반가정에서도 기계직 직물유입과 양장기술 보급으로 옷 만들기는 手工에서 기계화로 발전하면서 그 생산공정이 수월하여지자 다양한 의복이 등장하였다. 한편 1942년에는 학생복이 제정되고 남녀 중등생의 制服이 전국으로 통일된다.679)≪매일신보≫, 1942년 3월 19일.

 그러나 양복이 간편하고 시세에 따르는 복장이긴 하였지만, 농촌에서는 줄곧 한복을 입었다. 이때 한복의 기본은 上衣와 下衣·袍였다. 상의에는 속적삼·적삼·저고리·조끼·마고자·두루마기·토수 등이 있었다. 속적삼은 1920년대 셔츠가 들어와 대치된다. 마고자는 원래 만주족의 방한복인데 1887년 興宣大院君이 청국에서의 幽居생활에서 풀려 귀국할 때 입고 와서 퍼진 것으로 간편함으로 인해 남녀노소 모두 이것을 본 떠 만들어 입기 시작하였다. 두루마기는 주로 남자들이 입었던 袍의 한가지로 周衣(후루매, 두루마기)라고도 하였다. ‘두루마기’라 함은 ‘두루막혔다’는 뜻으로, 의제개혁 이후 상하귀천 없이 입게되면서 袍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더운 여름에도 갖추어 입어 의례복과 통상복의 기능을 겸하였다. 토수는 방한과 방서용으로 남녀노소가 손목에 끼어 사용하였는데, 상류층에서는 사계절 계속 실용과 멋·호사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920년대부터 장갑이 등장함으로써 차츰 가치를 상실하였다.

 신은 짚이나 가죽·옷감으로 만들어 사용하던 것이 고무신과 구두를 이용하게 되었고, 버선은 양말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구두의 판매는 양화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朝鮮鞋·경제화·고무화·학생화 등의 제품을 다양하게 구비한 곳도 있고, 1922년부터는 운동화·야구화·축구화·올림픽화·스파이크저화 등 전문적인 것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두를 신는 일은 일반인에게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으며, 운동화나 고무신은 배급제로 받아 신었다.680)≪매일신보≫, 1941년 3월 1일.

 양말도 1910년대부터 구두와 함께 광고되고 있는데, 지방 우송시의 소포비에 대한 것까지 자세히 소개되고 있으며, 1920년에는 양말직조공장에 대한 광고도 등장하였다.

 한편 일인들의 굽 높은 나막신 때문에 운동장 흙이 파이는 등 폐단이 심하자 “일인 나막신에 경고, 운동장이 결단난다”681)≪동아일보≫, 1926년 4월 21일.는 경고문이 나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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