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2. 의생활
  • 3) 변화의 양상
  • (3) 기타

가. 의복재료

 옷감은 자급자족의 가내수공업 형태가 공장제공업으로 바뀌면서 풍부하여지고, 구입은 5일장이나 재래시장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시중에 유통되는 직물 중에서 면직물은 무명·옥양목·고양사, 紵布는 모시, 麻布는 북포·춘포·안동포, 견직물은 명주·생명주·삼팔·갑사·숙고사·항라·당항라·진주사·관사·국사·순인·영초·법단·왜증·문화견, 모직은 세루·사지·융, 인조견에는 강화인조 등이 있었다.690)≪조선일보≫, 1928년 4월 3일.
≪매일신보≫, 1928년 11월 17·18일.
이 옷감 중에서 비단은 대부분 일본이나 홍콩·중국산이었으며,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은 품질도 나쁘거니와 소량이었다. 가정에서 가내수공업으로 베틀로 짜던 전통 직물은 자급자족 형태였으며 특산명품은 한산의 모시, 안동의 안동포, 상주의 명주정도였다. 이 외에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다량 생산된 것은 1920년대 초부터 선전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주로 면직물691)≪동아일보≫, 1921년 2월 27일, 1923년 4월 15일.과 모시이다. 이에 맞춰 “여름이 되면 모시로 모자를 만들 계획, 금년 여름 옷감은 여러 가지로 개량된 조선모시로 하자”692)≪동아일보≫, 1923년 4월 2일, 1925년 5월 26일.는 등 우리 옷감 쓰기 운동의 일환으로 토산옷감을 쓰자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조선산 광목 이용에 대하여 “해마다 오천만 원이 해외 유출로 빼앗기는데 우리의 힘으로 막으려면 우리 살림은 우리 것으로 해야 하므로 조선광목을 팔고 조선광목을 입자”고 하는가 하면,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 純朝鮮優良木으로”라는 선전과 함께 三星表·불로초·목탁표·삼신산·天桃 등 다양한 상품이 생산되었다.693)≪동아일보≫, 1925년 5월 10·25일.

 1940년 水原에서는 목화심기 장려로 “질긴 옷을 입으려면 목화를 심도록”694)≪조선일보≫, 1940년 12월 19일. 하였다. 한편 강점기 막바지에 오면 민간에서는 목화심기와 누에치기를 강요당하는데, 목화나 누에고치는 모두 공출 당한다. 혼사 때 이불에 쓰려고 조금씩 마련해 두었던 솜도 모두 뺏기는가 하면, 누에로 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데도 감시가 심해서 맘대로 하지 못하였다. 베틀소리만 나면 쫓아와서 확인하고 압수당하기 때문에 초저녁에는 가마니를 짜고 옷감은 밤중에 몰래 짰다.

 양잠은 왕실에서 왕비도 누에치기를 한다695)≪매일신보≫, 1916년 1월 1일, 5월 30일.
≪동아일보≫, 1924년 6월 17일.
고 근황을 홍보하는 등, 민간에도 계속 蠶業을 장려시키고 있다.696)≪동아일보≫, 1927년 5월 18일. 이때 비단이 많이 사용되는데 “현재 쓰고 있는 비단옷감의 종류”697)≪조선일보≫, 1936년 3월 14·19일.와 “예뻐지려면 좋은 옷감을 골라 쓰도록”698)≪조선일보≫, 1935년 3월 13일.하는 안내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인조도 많이 생산되었는데 비단과 비슷하여 眞假를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비단과 인조견을 구별하는 법을 안내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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