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4. 주생활
  • 2) 근대건축가들의 등장과 문화주택

2) 근대건축가들의 등장과 문화주택

 근대적 건축기술의 보급은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과 함께 시작된다. 1899년 상공학교의 설립은 근대적 기술교육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건축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학교는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것으로서 한국인들에게는 극히 소수만이 교육의 혜택이 주어졌다. 1919년에 이르러 박길룡·李起寅 등이 졸업하면서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가 탄생한다. 1945년까지 약 60명 정도의 한국인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주로 관공서에 배속되어 공공건축의 설계나 시공에 참여하였다.

 한국인 건축가가 독립적인 설계를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32년 박길룡 설계사무소의 개소와 미국 유학에서 돌아 와 1933년 개소한 朴仁俊 설계사무소가 그 시작이었다. 근대적 건축교육을 받은 그들은 생활개선운동에 참여하여 전문가적 의견을 개진하면서 새로운 주거형식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은 근대화된 생활양식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주거형식으로서 소위 ‘문화주택’의 모델이었다.

 김유방은 소위 ‘문화생활’에 적합한 2개의 주택모델을≪개벽≫에 발표하였다.732)김유방,<문화생활과 주택>(≪開闢≫, 1923년 2월∼3월호). 그의 대안은 현관과 중복도를 갖춘 집중형 평면구성으로서 일본식 도시주택의 평면과 유사하다. 입식생활을 위한 공간구성으로서 대청을 없애고 거실의 독립성 추구하였으며, 그 외관은 서양식 방갈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평면이나 외관에 있어서 서양식 주택에 가까운 형식으로서, 도시의 중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의 모델이었다.

 金允基의<건강주택안>733)김윤기,<유일한 휴양처 안락홈은 어떤 곳에 세울까>(≪동아일보≫, 1930년 9월 27일).은 거주자의 합리적 생활양식·위생성·경제성 등을 목표로 제안되었으나, 이 또한 근대 일본의 도시주택 유형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시 현관과 중복도가 도입되었고, 구조는 목구조로서 외벽은 스터코로 처리되었다. 침실에 다다미만 설치한다면 근대 일본식 도시주택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평면과 구조를 채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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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김윤기의<건강주택안>
<그림 1>김윤기의<건강주택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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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길룡의<개량주택안>734)박길룡,<조선주택 개량안>(≪동아일보≫, 1936).
최순애, 앞의 글, 129쪽에서 재인용.
은 재래식 주택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재래 중정식 배치 탈피하여 집중식으로 공간을 배치한 것은 위의 두 안과 유사하나 전통주거의 규범들이 나름대로 지속된 것을 볼 수 있다. 주거부분(침실)과 종속부분(주방·욕실·변소 등)이 분리되었으며, 8척(2.4미터)를 한 간으로 하는 모듈을 사용했다는 점, 현관 가까이에 사랑방을 두어 안방과 사랑방을 격리시킨 점 등은 전통주거규범의 존속으로 볼 수 있다.

 吳英燮이 조선건축회 주체의 조선풍 주택경기 대회에 출품하여 1등 당선안735)조선건축회,≪조선과 건축≫16-11(1937), 속표지 부분.으로 채택된 작품은 ㄱ자형 전통주택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주목된다. 전면의 툇마루와 중앙대청을 사이에 둔 침실의 구분이라는 전통적 평면형식을 현관을 사용하여 집중형 평면으로 재구성한 대안이다. 내부 욕실과 부엌을 두어 주생활의 편리성을 추구한 것이 근대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1930년대 이후 극심한 주택난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들도 제시되었다. 박길룡의<소액수입자를 위한 주택시안>에서는 2호 1동의 연립주택안이 등장했고, 노무자 주택시안에서는 국민주택형의 대량생산을 위한 모델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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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조선풍 1등 당선안>
<그림 2><조선풍 1등 당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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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러한 안들은 생활개선운동의 일환으로 제안된 건축가들의 계획안에 불과하였다. 이들의 생각이 작품으로 실현된 것은 주로 소수의 상류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과 별장이었다. 당시 건축가들에게 설계를 의뢰할 만한 수요계층은 소수의 상류계층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기호와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수의 상류계층에서는 전통건축의 개량을 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새로운 시대에 유행하는 소위 ‘문화주택’을 갈망했다.

 1930년대 이후 한국인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된 주택작품들은 당시 상류계층의 기호와 건축가들의 건축적 방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시 상류계층에 유행하는 문화생활이란 식민지배자로서 일본인들과 그들이 선호하는 유럽인들의 생활양식이었다. 이러한 생활양식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거양식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일본을 통해 수입된 또 다른 형태의 식민양식이라 할 수 있다.

 1929년 박길룡의 작품인 金秊秀씨 주택은 서구화된 주거공간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2층으로 구성된 철근콘크리트조의 이 주택은 1층에 현관과 주방·식당·욕실·하녀실·객실 등을 두었고, 2층에는 침실·서재·예비실 등을 두었다. 1동의 건물 안에 모든 주거공간을 수용하였고, 현관을 통해 출입하며, 중복도와 계단으로 각 공간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서구주택의 집중형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부엌과 식당·욕실 등을 내부공간화 하였고, 입식의 객실과 서재를 두었으며, 공사생활의 층별 분리가 이루어진다는 점도 유럽도시 주택의 전형적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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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金秊秀씨 주택 외관
<사진 1>金秊秀씨 주택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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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崔昌學씨 주택 외관
<사진 2>崔昌學씨 주택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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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의 외관은 식민양식적 경향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고급건축의 이미지를 요구하는 당시 상류계층의 기호에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金世演이 설계한 최창학씨 주택(1936)은 석조 2층 건물로서 르네상스 양식을 채용하였으며, 兪元濬의 작품인 김용제씨 주택(1930) 역시 2층 석조건물로서 서구 고전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한편 박길룡의 작품인 金明鎭씨 주택(1931)이나 북단장처럼 근대건축의 기능주의적 성격을 갖는 주택도 설계되었다. 이는 한국건축을 세계적인 시대조류에 편입시키는 선구적 시도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을 통해 유입된 국제적 유행의 모방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근대성은 특히 건축 구조와 재료 등에서 획기적 변환을 가져왔다. 근대건축의 중요 요소인 철과 유리·시멘트·벽돌 등 공장제 제품이 주택건축에 사용될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를 보여주었다. 이는 건축 생산양식의 획기적 전환인 동시에 형태의 다양성을 열어준 선구적 시도였던 것이다. 다만 서구식 구조와 재료의 도입은 서구 양식의 수입에 포함된 것이기에 비판적 해석을 통한 한국적 양식의 창출로 이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가들의 시도 마저 소수의 상류계층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일반화되기는 어려웠다. 상류계층의 요구도 당시 선진국의 유행을 모방하는 것을 갈망하였으며, 건축가들의 건축적 지식 또한 일본인들로부터 전수된 서구의 근대건축으로서 방법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려했던 “우리의 장구한 생활이 낳은 재래형식을 토대로 하여 과학적인 양식의 구축법을 구성수단으로 하고 우리의 취미로 장식하여 현대 우리생활의 용기가 될 기구”로서의 주택 설계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기의 건축가들은 한국건축의 근대화를 시도했던 선구자들로서 일본과 유럽의 건축적 방법을 도입했다는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이를 전통건축과 접목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전통단절의 시초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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