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Ⅵ. 민속과 의식주
  • 4. 주생활
  • 3) 도시형 한옥의 등장

3) 도시형 한옥의 등장

 식민지기 일본인들의 한반도 진출은 전통적인 주택생산양식을 변환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공무원이나 회사원들을 위해 새로운 주택이 요구되었고 일본인 주택업자들에게는 이들을 위해 관사·사택·독신료 등을 공급할 건설시장이 마련된 것이다. 일본인 주택업자들은 1915년부터 주택의 매매·임대를 하면서 주문생산에서 벗어나 주택건설을 사업화하기 시작했다.736)대한주택공사,≪대한주택공사 20년사≫(1979), 161쪽. 공급자와 수요자가 분리된 주택시장의 형성은 소위 집장사라 불리우는 한국인 주택업자들의 출현을 도와주었다.

 일제의 식민수탈과 산업화에 따른 이농향도의 인구이동으로 인구의 도시집중이 이루어지면서 대도시에서는 주택수요가 폭증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인 주택업자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1920년대까지 이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서울의 도심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 서울의 도심부에 있었던 대규모 주택은 이들에 의해 소규모 필지로 분할되면서 수십 호의 소주택군으로 건설되었다.737)송인호,≪도시형 한옥의 유형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0), 22∼25쪽. 이는 전통적인 주문생산에서 벗어나 상품으로 주택이 건설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시작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도심 주변부에 마련된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는 이들에게 대규모 주택건설의 무대를 제공해 주었다. 서울의 돈암정·안암정·신설정 등 대규모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에서 이들은 시장적 가치가 있는 주택을 건설해야 했다. 이들이 선택한 주택상품은 개량된 한옥이었다. 일부 상류계층에 의해 선호되는 ‘문화주택’은 당시 대중들의 주의식을 충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산비가 비싸고, 주택업자들이 가진 기술력의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이들은 전래되어 오는 주택양식을 기본으로 근대적 건축부재를 첨가하여 새로운 한옥의 양식을 창출하게 된다. 이를 ‘개량한옥’ 또는 ‘도시형 한옥’이라고 부른다.

 도시형 한옥은 서울 경기지방의 전통적인 중·상류 주택을 모방함으로써 상품적 가치를 강조하였다. ㄱ자 혹은 ㄷ자 형태로 마당을 위요하며, 중앙에 대청을 두어 침실을 분리시키는 평면은 서울·경기지방의 전형적 주택평면이었다. 다만 대지가 협소한 관계로 사랑채나 사랑방은 시설되기 어려웠다. 五樑架構의 목구조에 소로를 수장하고, 부연까지738)오량가구란 도리 5개와 장연과 하연을 이용하여 구성된 지붕틀을 의미한다. 소로는 창방과 장혀사이에 넣은 수장재이며, 부연은 덧서까래를 말한다. 오량가구·소로·부연 등은 조선시대 고급주택에서 사용되었던 건축요소였다. 단 날렵한 처마곡선을 갖는 기와지붕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상징이었다. 이는 양반집을 동경하던 당시 서민들의 주의식과 기호에 부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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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명륜동 도시형 한옥 외관
<사진 3> 명륜동 도시형 한옥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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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명륜동 도시형 한옥내부
<사진 4>명륜동 도시형 한옥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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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자 혹은 ㄷ자의 평면형태는 사방으로 연접된 이웃집과 통행량이 많은 도로에서 내부공간의 기밀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적절한 형태였다. 높은 담을 설치할 경우 담과 건물사이에 공간의 낭비가 발생하며, 폐쇄적인 외벽으로 집중형 공간을 만들 경우 채광과 환기가 불량해 지기 때문이다. 다만 택지의 축소로 인해 마당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으며, 도로에 면한 밀집된 대지조건에서 내부공간의 기밀성을 높히기 위해 폐쇄적인 대문간의 설치가 필요했다. 대문간에는 화장실을 설치하여 침실과 격리시키는 전통적 규범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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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경성지방 민가 일반형
<그림 3>경성지방 민가 일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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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형 한옥은 공간의 구성이나 성격·형태를 조선시대 상류주거에 근거하면서도 근대적 건축재료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개량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도시형 한옥에 새롭게 사용되기 시작한 재료는 벽돌과 유리, 그리고 함석 등이었다. 이러한 재료의 사용은 도시주택에 대한 법적 규제에 기인된 것도 있지만 공간사용의 편리성이나 구조의 내구성·의장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기능적 요구였다.

 새로운 재료의 사용에 따른 전통한옥의 변화에 대해 金鴻植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새로운 재료로서 함석이 저렴하게 공급되자 처마 내밀기를 짧게 하여 지붕의 하중을 줄이는 반면 함석차양으로 처마 내밀기를 대신하였다. 함석의 장점은 물매를 최대한 낮게 할 수 있고 물매의 방향이 자유로웠으므로 추녀 끝을 하늘로 더욱 치켜들 수 있었다. …(중략) 싼 유리의 대량공급으로 대청이나 툇마루에는 미서기 유리문을 설치하여 여름철에만 이용하던 마루의 이용기간을 확대시켰다. 또한 다량의 우수한 벽돌공급은 마루 밑 고막이등 쥐를 막는데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굴뚝은 물론 자연석 혹은 사고석 화장담 상부에 장식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김홍식,≪민족건축론≫, 한길사, 1987,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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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도시형 한옥 평면
<그림 4>도시형 한옥 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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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니스와 폐인트·타일 등도 기능적 또는 의장적 이유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도시형 한옥의 등장은 일제시기의 주거양상을 이해하는 데 세 가지 측면에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그 첫째는 주택생산양식의 변화이다. 전술한 것처럼 전래되어 오던 1:1 주문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상품생산에 의한 대량공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이행과정에서 주택건설의 산업화와 주택시장의 형성을 의미한다. 또한 시장에서의 상품적 가치와 대량생산을 위한 규격화와 표준화를 의미한다. 한옥은 산업화 된 주택시장에서 일본식 주택이나 문화주택과 경쟁하여 상품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도시형 주택으로서 한옥의 가능성이다. 도시형 한옥은 좁은 택지와 밀집된 주거군, 공공도로 등 어려워진 대지조건에서도 적용되었다. 마당의 축소나 사랑채의 부재 등을 제외하고는 전통적 공간구성과 주거형태가 존속될 수 있었다. 오히려 근대화된 건축재료를 적절히 이용하여 기능성을 증진시켰다는 점에서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시형 한옥은 식민지 상황에서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인 건축가 笹慶一은 당시의 한국주택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 때의 한국가옥 지붕의 二重棰柱上에는 斗組를 사용하여 古來의 한국 勾配지붕으로 되돌아 갔다(朝鮮總督府,≪朝鮮≫, 통권 273, 1930).

 그것은 그때까지 지어 본 각종 방식에 불만이 있어 조선 고래의 국수보존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그것은 일본식 주택보다 한 발 앞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물론 이러한 주거상황은 도시형 한옥의 보편화에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전쟁을 위한 경제적 수탈과 급속한 도시화·공업화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옥은 더 이상 발전적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우선 식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일제의 목재남벌로 산림이 급속히 황폐화해 갔으며, 목재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목재를 주요부재로 하는 한옥은 가격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도시의 주택수요가 폭증하면서 단시간에 대량공급이 가능한 주거유형이 요구되었다.

 수공업적 생산방식에 의존하는 한옥의 생산은 이러한 대량생산의 요구에 적합할 수 없었다. 공업재료와 기계적 생산방식으로 생산되는 근대건축에 대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은 택지에 많은 주택을 싼값에 공급하기 위해 도시주택의 고층화와 고밀화는 필연적 과정이었고, 기계적 생산방식에 적합한 근대건축이 채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양근대건축이 한옥을 대체하는 보편적 주거유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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