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광복 전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 (3)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과 좌절

(3)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과 좌절

 9월 초 미군의 진주가 임박하자, 건국준비위원회 내에는 미군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미군정에 대하여 하나의 통일된 정부로서 대처하기 위해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6일 경기여고에서 1천 300백여 명의 인민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여운형을 임시의장으로 하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전국인민대표자대회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고, 임시정부조직법을 가결하였으며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아울러 전국인민대표자대회는 ‘朝鮮人民共和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다음과 같은 정강과 시정방침을 발표하였다.

1.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기한다.

2. 일본제국주의의 법률·제도를 즉각 철폐한다.

3.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분배한다.

4.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반역자들의 공장·광산·철도·항만·선박·통신 그밖의 모든 시설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

5.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6.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만 14세 이하의 유년노동을 금지하며, 만 18세 미만 청소년의 노동시간을 6시간으로 제한한다.

7. 국제평화 유지를 위한 우방국가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중요시한다.

 (정일준,<해방직후 분단국가 형성에 관한 일고찰>,≪해방직후의 민족문제의 형성과 사회운동≫, 창작과 비평사, 1990, 128쪽)

 이 밖에도 18세 이상의 남녀에 대한 선거권 부여, 남녀의 동등한 권리, 최저임금제, 실업 방지, 강제공출제 철폐, 의무교육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중요 산업기관의 국유화 등이 사회주의정책이라 하여 우익세력의 반발을 샀으나, 우익 민족주의단체들을 포함하여 대다수 독립운동단체들도 해방 전 토지와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인민공화국의 정강과 시정내용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대체로 온건한 내용들이었으며, 특히 토지관련 정책은 농민들로 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이 발표한 선언문과 강령, 그리고 정책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정방침 등으로 볼 때 조선인민공화국의 조직성격은 좌파지향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에 대해 철저한 투쟁을 한다는 내용, 노동자·농민의 생활향상, 세계 민주주의 국가와의 국제평화주의 등의 내용을 들면서 좌파지향적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176)전용헌, 앞의 글, 163쪽.

 조선인민공화국이 건국준비위원회의 해체와 동시에 급속도로 조직되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먼저 미군정 실시에 직면한 여운형과 박헌영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의 해방정국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필요성에서였다. 특히 좌파세력은 형식적이라도 국내 각계 각층의 사회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세력들을 만들어 미군정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주도권을 장악하여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즉 미군정을 이용하여 좌파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하였다. 둘째,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맞설 수 있는 정치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해방정국에서 중경의 임시정부가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고, 어느 정도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李承晩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한 것도 민중과 미군정으로부터 어느 정도 확고한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과 동시에 중경의 임시정부보다 우월한 지지를 확보하여 먼저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177)전용헌, 위의 글, 162∼163쪽.

 인민대표자대회는 중앙인민위원회의 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부 구성은 좌익이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면서도 좌우익을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부서장으로 선임된 인사들 가운데 우익은 모두 참여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좌익세력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주도하게 되었다.178)각료구성을 보면 중앙정부의 주석에는 이승만, 부주석 김구,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 김규식, 재무 조만식, 사법 김병로 등이었다. 이와 같이 명단에는 이승만·김구·김규식·김성수·김병로·안재홍·조만식 등 해외 및 국내의 저명한 우익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단에 포함된 우익 지도자들 중 이승만·조만식·김구 등은 아직 해외에서 입국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사전 협의를 받을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명단 발표 후에도 조선인민공화국 주도측에서 우익지도자들을 찾아가 수락을 요청한 일도 없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말하자면 박헌영과 여운형이 정세의 급박함에 밀려 진지성이 결여된 자세를 보여 ‘벽보내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대해 벽보내각이나 좌파조직이라는 비난이 대두되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갈라지면 넘어지고 뭉치면 일어선다. 한민당·국민당·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손을 잡고 국민 총력을 집결해야 하며 이것을 인민 대중은 원하고 있다. 그리고 사대주의 배외사상은 절대로 배격해야 한다.

 여운형은 국가 건설을 위해 사상적 차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여운형은 먼저 국내의 혁명동지를 규합·단결하여, 국가건설을 준비하고, 해외 혁명동지들이 입국하면 이들과 함께 혼연 일체의 과도정권을 세우려 하였다.

 여운형의 이러한 복안에도 불구하고, 주석으로 선출된 이승만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우익인사들은 조선인민공화국에의 참여를 거부하였다. 아울러 아놀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과 하지(John R. Hodge) 미군사령관은 10월 10일과 16일에 각각 성명을 발표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였다. 이들은 “미군정 기관은 남한에서 최고 통치기관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 두 개의 정부를 병립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조선인민공화국을 비합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해산을 명하였다.179)≪동아일보≫, 1945년 12월 9·13일. 이렇게 하여, 해방 직후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은 좌절되었다.

 미군당국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해산 명령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미군당국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국내 정치세력의 분열과 반목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우익세력들은 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에서부터 이에 대해 비협조적이었다. 여운형은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였으니 조선민족은 즉시 자주적으로 주권 확립에 매진하여야 하며 우선 국내외의 혁명단체를 총망라하여 새로운 독립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송진우 등 우파는 총독부가 연합군에게 정권을 인계할 때까지는 경거망동을 삼가고,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한국의 정통정부로 추대하자고 하였다.

 의견 차이가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여 해방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송진우 등은 여운형을 비난하고, 임정의 정통성 계승을 주장하면서 별도로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우파는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제의를 거부하고, 자파의 이익을 위해 미군에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그 결과 미군당국은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180)≪조선일보≫, 1946년 2월 24일.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이와 달리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여운형이 조선인민공화국의 대표 인물로 등장했기 때문에 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준비위원회의 연장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李庭植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설립은 박헌영계의 공산당에 의한 궁중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설립함으로써, 여운형과 그의 주변에 모였던 서울청년회파 내지는 장안파 인사들로부터 정치적 주도권을 박탈하고자 했으며, 조선인민공화국을 자기 주도하의 공산혁명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인민대표자대회 소집에 대해 여운형의 승락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중앙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조각 내용이 발표되었을 때에야 박헌영의 이러한 계략이 드러났으므로, 처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여운형은 박헌영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정식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한 대표자들의 대표성과 절차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중앙인민위원의 53.6%가 재건파 공산당원으로서 편파적 구성이었고, 이는 이미 조선공산당이 조선인민공화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이다.181)이정식,<인민공화국과 해방정국>(≪한국사 시민강좌≫12, 일조각, 1993), 15∼45쪽.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앙에서 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이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중앙인민위원회의 활발한 활동은 전국적으로 지방인민위원회의 결성을 촉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각 지방에서 각 지방인민위원회가 조직되게 되었다. 남한의 7도 12시 148군에 걸쳐 다음<표>와 같이 인민위원회의 지방조직이 완결되었다.

전국 총수 38도 이남 38도 이북 비고
세수 기조직 미조직 세수 기조직 미조직
13 9 7 2 7 6 1 경기도 북부, 황해·강원도 남부




 
21 12 12 - 9 9 -
218 148 148 - 70 70 -
103 75 75 - 28 28 -
2244 1680 1667 13 564 564 -
2 2 2 - - - -

<표>인민위원회의 지방조직

김남식,≪남로당연구≫Ⅲ(돌베개, 1988), 35쪽.

 미군정은 진주하면서부터 지방인민위원회 등의 정치조직을 매우 좌익적인 것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경계하고 대응하는 전략을 취하게 되지만, 미군정 관리가 지적하였듯이182)미군정의 통치구조에 대해서는 당시 전남지방 미군정청 정보국장이었던 Meade, Grant 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New York:ColumBia University, Kings Crown Press, 1951(안종철 옮김,≪주한미군정연구≫, 돌베개, 1993) 참조. 지방인민위원회는 완전하게 좌익적 성향의 조직만은 아니었다.183)안종철, 앞의 책(1991)을 참조.

 각 지방인민위원회의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해방초기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했던 연로한 보수세력이 거의 탈락하고 일제하의 항일운동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활동가들이 중심이 된 조직이었다. 도인민위원회의 조직이 정비되고 실질적으로 지방행정을 장악해 나가면서부터 활동력이 떨어지는 연로한 보수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그후 미군정과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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