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광복 전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신탁통치 논쟁과 좌우대립
  • (1) 모스크바 결정과 국내의 파장

(1) 모스크바 결정과 국내의 파장

 연합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종전을 맞았다. 연합국이 합의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것과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 뿐이었다. 특히 신탁통치 문제는 당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가 제안하였고, 이에 대해 스딸린이 구두 합의해 준 상태였다.

 이러한 합의 내용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이 1945년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모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군사상의 목적을 위해 잠정적으로 미·소 양군에 의해 분할된 남북한을 통일시키고 독립을 달성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협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

1. 한국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국가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일본의 가혹한 지배의 잔재를 조속히 청산하기 위하여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산업·교통·농업 등의 발전과 민족문화 발전을 위한 제반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이다.

2. 한국에 민주적인 임시정부의 수립을 실현하기 위해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 대표들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제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한다. 이 위원회의 건의는 미·소·영·중 4개국 정부에게 제출되어 검토된 후 미·소 양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

3. 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임시정부와 민주적 제 단체의 협력 아래 한국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발전시키며, 민주주의적 자치정부를 수립하여 독립국가로 육성시키는 데 그 사명이 있다. 공동위원회는 한국 임시정부와 타협한 후 미·소·영·중 정부에 제출하여 4개국에 의한 최장 5개년간의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할 것이다.

4. 남한 및 북한에 관한 긴급문제의 심의를 위하여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 사이에 행정·경제분야에서 부단한 협력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을 검토하기 위하여 미·소 점령사령관의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2주일 내에 개최한다.

 모스크바 3상협정의 핵심 내용은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의 참여하에 미·소·영·중 4개국이 주도하는 신탁통치 협정을 미·소가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독립을 유보하고 유엔 주도하의 신탁통치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과 한인의 참여가 보장된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소련의 안이 교묘하게 중첩된 타협의 산물이었다.184)전시 연합국회담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미국이 적극 주장하였는데, 협정 내용으로 볼 때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소련측이 모스크바 결정을 주도하였다.

 흔히 모스크바 3상협정이 곧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신탁통치는 정확히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중 신탁통치 실시 조항’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 핵심적 내용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핵심적 내용이 ‘임시정부 수립’이 아닌, ‘소련의 제의에 의한 신탁통치 결정’으로 국내에 왜곡 전달됨으로써 즉각적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감정을 자극하였다. 당시≪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 것으로 보도하여185)≪동아일보≫, 1946년 1월 27일. 여론을 들끓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외신도 ‘신탁통치 결정’을 부각시켜, 3상협정의 내용을 왜곡하였다. 해방과 함께 독립을 기대하고 있던 민중은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익을 막론하고 이를 격렬히 비난하였다. 신탁통치를 일제의 지배와 유사한 식민상태의 연속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모든 민족세력은 탁치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한반도에 새로운 정치적 소용돌이가 불어 닥쳤다.186)이동현,≪한국신탁통치≫(평민사, 1990), 82∼96쪽.

 이러한 내용의 결정문이 한반도에 알려지게 되자 한민족은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운동에 민족의 단합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36년간의 식민지체제의 억압적 상태가 또 다시 지속된다는 두려움과 즉시 독립국가를 달성해야 한다는 국민의 바램이 반탁운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반탁정국’은,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이 기존의 반탁주장을 철회하고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로부터 좌우익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노정된다. 소련의 지시를 받은 좌익은 신탁통치가 단순한 원조를 의미하는 후견제이며, 임시정부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에 따라 실시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평가하면서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신탁통치를 식민지화로 판단한 우익은 찬탁을 매국행위로 간주하면서 맹렬히 반대운동에 모든 힘을 결집시켰다.

 이처럼 신탁통치 문제로 정국이 혼미를 거듭하자 곤경에 빠진 것은 미군정청이었다. 미군정청은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고 실천해야 할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한민족 사이에 고양된 민족감정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미군정청에 우호적이고 협력적이었던 우익세력까지도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미군정청이 경계하는 좌익세력이 모스크바협정을 찬성하는 상반된 상황은 미군정청의 정책 대안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해방을 기점으로 정치세력들간에 형성되었던 ‘애국 대 매국(친일)’이라는 대립구도는 신탁통치 실시문제를 계기로 ‘좌익 대 우익’의 구도로 전환되게 되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구도에서 역사적 정당성이나 과거의 친일경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오직 상대방을 정국 무대에서 제거하고, 자신들의 이익이 관철되고, 자신들이 의도한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구도를 중심으로 양 진영은 각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하여 제각기 통일전선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여 우익은 비상국민회의를, 그리고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함으로써 좌우익 대결구도는 더욱 증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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