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좌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3) 조선신민당

(3) 조선신민당

 조선신민당의 전신인 華北朝鮮獨立同盟(이하 독립동맹)은 1942년 7월에 華北朝鮮靑年聯合會가 확대·개편된 민족해방운동단체였다. 독립동맹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활동했던 武亭·李維民 등 공산주의자들과 楊民山 등의 조선민족혁명당원 출신, 崔昌益·韓斌 등 국내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인물들, 金枓奉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자로 구성된 단체였다. 이들은 일본이 패망하자 11월 초 중국의 奉天에 집결하여 동포와 일본군으로부터 나온 한인 병사들을 흡수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332)심지연,≪조선신민당연구≫(동녘, 1988), 47∼48쪽. 만주에 있었던 한국인들과 일본군에서 이탈한 한인 병사들의 흡수를 통해 조선의용군 병력은 약 3만여 명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독립동맹의 활동에 대해서는 한홍구,<화북조선독립동맹의 조직과 활동>(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8) 참조.

 이 중 1,500여 명의 조선의용군 선발대가 1945년 11월 말 신의주에 도착했지만,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333)조선의용군이 항일독립운동 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장해제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정부 없는 민족에 군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북한내에 정식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대규모의 부대가 북한내로 들어올 경우 정치적 혼란이 가중될 것을 우려한 소련군대의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동맹의 간부들이 소련측과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독립동맹의 간부와 조선의용군의 일부만이 무장을 해제한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同盟 目前의 정치주장’을 발표한334)≪중앙신문≫, 1945년 12월 21일(방기중,≪백남운의 정치경제사상 연구:1930·40년대를 중심으로≫,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250쪽에서 재인용). 이후 정세를 관망하던 독립동맹은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자 1946년 1월 초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하고,335)≪조선인민보≫, 1946년 1월 10일. 1월 14일 ‘조선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돌입하였다.336)≪조선인민보≫, 1946년 1월 26일. 독립동맹세력이 ‘조선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정확한 일자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심지연, 앞의 책, 1988, 75쪽 주 98 참조).

 무정·金昌滿·朴一禹·許貞淑 등이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반면, 김두봉·최창익·한빈 등은 소시민·지식인·중산층 등을 중심으로 조직 확대사업에 들어가는 한편, 서울에도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 25일 한빈을 비롯한 독립동맹의 간부들이 서울에 도착하여 조공을 비롯한 3상회의 지지세력과의 접촉에 나섰다. 독립동맹세력은 식민지시기부터 유명한 사회주의 학자였던 白南雲을 적임자로 선택하고 1946년 2월 5일 독립동맹 京城特別委員會를 조직하였다.

 북한의 독립동맹은 1946년 2월 26일 당의 명칭을 朝鮮新民黨으로 바꾸었으며,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도 신민당 경성특별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38선 이북의 조선신민당은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주석에 최창익과 한빈이 임명되었으며, 경성특별위원회는 위원장에 백남운, 부위원장에 鄭魯湜이 임명되었다. 조선신민당의 인적 구성은 조선인민당과 비슷했다. 우선 38선 이남과 이북의 책임자였던 백남운과 김두봉은 학자 출신으로 정노식과 함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으며, 최창익·高贊輔·具在洙 등은 식민지시기 연안의 독립동맹에서, 또는 독립동맹의 공작원으로 활동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조선신민당의 정치노선 역시 조선인민당과 비슷했다. 정치노선으로 자산계급성 민주주의 혁명, 또는 연합성 신민주주의을 내세웠는데,337)최창익,<민주적 민족통일전선의 역사성에 대하야 3>(심지연, 위의 책, 87쪽에서 재인용).
백남운,≪조선민족의 진로≫(신건사, 1946), 21∼22쪽.
조선인민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신민당의 노선이 조선인민당의 노선과 비슷했던 점은 제일의 정치적 과제로 ‘민족적 대동단결’을 내세웠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338)백남운, 위의 책, 13쪽. 조선신민당이 자산계급의 일부를 포함하는 협동전선의 노선을 내세운 데에는 조선공산당에 포섭되지 않은 인사들을 포괄하기 위한 의미도 있었지만, 하층에서뿐만 아니라 상층에서의 통일전선을 강조했던 중국공산당의 ‘신민주주의’ 노선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339)심지연, 앞의 책(1988), 83∼87쪽. 조선신민당이 내세운 ‘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중국의 毛澤東이 1940년대 초반 7전대회를 통해 확립한 노선에 사용된 용어와 같은 것이었다.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당시의 사회적 과제를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으로 나누어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에서 일부 자산계급과의 연합을 주장한 것은 ‘민족해방’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자산계급은 ‘민족해방 즉 자주 독립이 실현되는 순간’까지 “민족해방을 위한 혁명세력의 일부를 대표”하고 있다고 규정하였다.340)백남운, 앞의 책, 14쪽. 민족적 과제와 사회적 과제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는 민족적 과제를 보다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좌익 정치세력으로서 조선신민당이 추구한 노선은 넓게 보아 조공·조선인민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요 산업의 국유화,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정책,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개인기업의 보장 등은 좌익계열의 3개 정당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신민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좌익세력 내부에서는 논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백남운의≪조선민족의 진로≫는 조공의 이론가들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朝鮮科學者同盟의 李基洙는 좌익을 민주진영으로, 우익을 반민주진영으로 규정하고 양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와 대립이 있기 때문에 두 개의 노선은 타협으로 해결될 수 없고 오직 힘의 관계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관계에 놓여 있는 좌우익의 연합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개 학자의 관찰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자산계급의 일부가 그 혁명성으로 말미암아 무산계급과 동맹한다면 그것은 “혁명 수행을 위한 동맹군의 문제이고 혁명의 성질과는 딴 문제”로 그것이 조공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을 부정할 근거는 아니라고 주장했다.341)이기수,<백남운씨의 연합성신민주주의를 박함>(≪신천지≫1권 5호, 1946년 6월). 결론적으로 그는 연합성 신민주주의는 기회주의적 성격을 띤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조선문학가동맹의 金南天도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을 비판하였다. 그의 비난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이 있었는데, “망명 정치인의 겸손치 못한 심경이거나 과오와 경솔로 정치적 주변으로 밀려난 불평 정객의 대변에 불과한 것”이라는 평가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342)김남천,<백남운씨 ‘조선민족진로’ 비판 1>(≪조선인민보≫, 1946년 5월 9일). 김남천의 비판은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이 지주나 자본가의 편에서 그들의 혁명성을 입증하기에 편리한 대로 자의적 용어를 구사한 것이며, “소위 우익을 구성한 친일 재벌 대지주와 그들의 정치적 대변자들에 대한 절충주의적·기계주의적 과신과 지나친 진보성의 기계주의적 인정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343)김남천,<백남운씨 ‘조선민족진로’ 비판 4>(≪조선인민보≫, 1946년 5월 12일).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을 둘러싼 논쟁은 비판에 대한 ‘再批判’에서 잘 나타나듯이344)허윤구,<조선민족의 진로에 대한 비판의 재비판 1∼5>(≪독립신보≫, 1946년 5월 25·26·27·28·29일). “그 자신이 가진 이론적 貧因에서 결과지워진 것”으로 다시 비판되었다.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은 조공 이론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 조선인민당의 정치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토지개혁과 관련된 정책은 38선 이북의 조선신민당 본부의 정책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조공의 토지개혁정책과 비슷한 것이었다.

 조선신민당의 노선을 둘러싼 논쟁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의 성격이 강했다. 이 점은 이기수의 글과 김남천의 글이 발표된 것이 1946년 5월과 6월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1946년 5월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에 들어가고 좌우합작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조공은 조선인민당의 여운형과 조선신민당의 백남운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좌우합작위원회의 성패여부가 자당의 좌익 내 주도권 장악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인식했을 것이며 이것이 조선신민당의 노선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신민당은 3상회의 결정서에 대한 지지,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지지, 38선 이북에서의 토지개혁에 대한 지지, 민전에의 적극적 참여 등 38선 이남과 이북에서 조선공산당·북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과 보조를 함께 하면서 활동하였다. 38선 이북의 조선신민당은 2당합동을 통해 북조선공산당과 함께 北朝鮮勞動黨을 결성한 반면, 조선신민당 경성특별위원회는 좌우합작위원회, 3당합당 과정을 거치면서 분열되고 해체되었다. 결국 경성특별위원회의 일부 세력들은 社會勞動黨, 근로인민당과 결합하거나 1947년과 1948년을 통해 월북, 북조선노동당이나 북한의 사회조직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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