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5·10선거를 主務하는 책임자였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평양남북지도자회의에 대하여 여러 차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5월 3일 남북협상에 대하여 장문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성명에서 “이 회합에 유일한 예외는 김구씨와 김규식 박사가 참가한 것인 바, 현재까지 양 김씨를 존경하여 오던 남조선 내 동지들은 자기의 지도자가 애국적이긴 하나 無見識한 비공산주의자들을 끌어넣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공산당의 모략에 빠졌다는 사실을 통탄하고 있다”라고 지적하여, 두 김이 공산당의 모략에 빠졌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남조선 내의 유권자들의 90% 이상이(선거인 명부-필자) 등록을 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여 5·10선거만이 정통성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승만은 4월 30일 발표된 공동성명서가 국내에 알려지자 5월 3일 담화를 발표하여, “남북요인회담에 대하여서는 내가 기왕에 설명한 바 있으므로 우리의 旣定 계획에 조금도 변동이 있을 리 없다”고 말하여, 공동성명서가 단정수립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음을 피력하였다. 그는 이 담화에서 “그러므로 소위 공동성명이라는 것을 나는 중요시하지 않는다”라고 천명하였다.
서울에 돌아온 김구·김규식은 5월 6일 두 사람 이름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이 공동성명에서 남북지도자간에 남조선 단선단정 반대와 외군철퇴에 의견이 일치하였으며, 북조선당국자도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하였음을 밝히고,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였음을 摘示하였다. 그리고 공동성명서에 표시된 바와 같이(제2항-필자) 남북이 동족상잔에 빠지지 아니할 것을 확언한다고 하여, 4·30공동성명서가 남과 북의 단정 수립문제,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구체적 방안의 마련, 전쟁과 그로 인한 동족상잔 방지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밝혔다. 또한 회의에서 국제협조문제 등 수개 문제에 자신들의 종래 주장이 관철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남북지도자들이 자주 접촉하여 그러한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남북지도자회의가 유엔소총회 이전에 열렸더라면, 미국이 세워놓은 단정 수립 스케줄에 어떠한 형태로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지만, 5·10선거가 결정이 된 이후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였다. 김규식 등 북행한 민족주의자들의 상당수는 이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은 남에서의 단선단정 반대운동을 고무시켰고, 남의 친일파가 포함된 친미극우세력에 의한 단정운동·도덕성에 타격을 가하였다. 또한 그것은 북의 정부수립에 상당히 정통성이나 도덕성을 부여하였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북의 단정수립도 분명히 반대하였지만, 좌익이 아니더라도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남의 정부수립에는 비판적이었어도 북의 정부수립은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북의 정권은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사고도 없지 않았다.
4월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와 남북협상 곧 남북요인회담은 명확히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연석회의는 남의 단선단정 반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북측과 소련측의 스케줄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4김회담이 중심이었던 남북요인회담은 북이 마지못해 응했던 것이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연석회의는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남과 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집회 같은 것으로,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의 연대를 최대한 시위할 수 있는 방식이었고, 그래서 북측은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최대한 부각시켰다.448)丁海龜,≪남북한 분단정권 수립과정 연구 1947. 5.∼1948. 9≫(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5), 201∼203쪽.
남북요인회담은 독립운동과 마찬가지로 당장에는 실현될 수 없더라도, 또 북측의 입장과 국제관계 등으로 여러 사항을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하였지만, ‘통일독립’의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였다는 점, 동족상잔의 전쟁을 명시적으로 막아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두 김 등 민족주의자들의 북행과 남북·좌우합작을 지지해 온 좌파 인사들의 노력은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방안을 마련하려 할 때 여러 면에서 격려와 참조가 될 수 있다.
북측은 연석회의와 남북협상이 혼동되고 있는 속에서 당장에는 남의 단선단정 반대와 자신들의 정권수립에 두 회의를 크게 활용하였지만, 공동성명서 2항·3항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하였다는 점에서 도덕성과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협상에 의해서 곧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대다수 민족구성원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남북협상은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을 반영한 만남이었다. 단정운동세력은 북과의 대결 위주로 나아가고 있었고, 북측 또한 비슷한 사고를 하였는데, 남북협상은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기본과업과 함께 남과 북의 긴장과 갈등, 전쟁-동족상잔을 막기 위한 결단으로 이루어졌다.
4·30공동성명서는 해방 3년 동안에 남과 북의 주요 지도자가 통일정부 수립문제에 합의를 본 유일한 문서다. 이것마저 없었더라면, 한국인은 분단을 막기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는 물음에 무슨 답변을 할 수 있을까.
<徐仲錫>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