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1. 미군정기의 사회
  • 1) 미군정기의 사회경제적 상황
  • (2) 사회적 혼란

(2) 사회적 혼란

 경제적 혼란과 더불어 해방 직후 미군정기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또 하나의 요소는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야기되었던 사회적 혼란이다. 당시의 사회적 혼란에는 귀환동포문제와 식량문제의 두 문제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자는 해방과 더불어 만주와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대거 몰려들었던 귀환동포들의 문제였으며, 후자는 일제 전시경제가 붕괴된 속에서 야기된 식량부족사태와 이에 대한 미군정의 적절치 못한 대책으로부터 비롯된 문제였다.

 우선 귀환동포문제와 관련하여 해방후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던 남한 인구 증가의 추이를 살펴보면 다음<표 5>와 같다. 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해방 약 1년 전부터 해방 후 약 4년에 걸친 총 5년 동안 남한인구는 약 430만 명 이상457)1944년 시점에서 남북한에 거주했던 약 70여만 명의 일본인이 해방 직후 철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실제 인구 증가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증가했다. 그것은 1949년 당시 남한인구가 약 2천만 명 정도였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증가였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인구의 자연 증가보다는 해방과 더불어 국내에 쏟아져 들어왔던 해외동포 입국자 및 북한으로부터의 월남자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특히 1945년 8월의 해방 직후로부터 1946년 8월에 이르기까지의 약 1년 동안에 남한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이 기간에 귀환동포의 유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구 분 총인구 남자 여자 증가
1944년 5월 1일 15,879,110¹ 7,484,242 8,031,868  
1945년 말 46,873,277     994,167²
1946년 8월 25일 19,369,270     2,495,993
1947년 말 19,886,234     516,964
1948년 말 20,027,393     141,159
1949년 5월 1일 20,188,641 10,200,877 9,987,764 161,248
5년간 증가인구 4,309,531 2,716,635 1,955,896  
5년간 증가율 27.1 36.3 24.4  
연평균증가율 4.92 6.39 4.46  

<표 5>해방 전후의 남한인구 (단위:명, %)

통계청,≪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사회상≫(1993), 1∼4쪽을 이용하여 작성.
 1. 1944년 5월 1일 현재 남북한 전체 총인구는 25,917,881명(일본인 712,583명과 기타 외국인 71,946명 포함).
 2. 이 시점에서 일본인 대부분이 철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실제 증가는 1백 수십만 명으로 추정됨.

 그렇다면 해방 후 이루어졌던 이상과 같은 인구 증가 중에서 귀환동포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표 6>에 따르면, 해방후 3년 동안 해외동포 입국자는 무려 122만 명을 넘었고 월남자 역시 97만 명에 이르러,458)해외동포에 북한경유 중국·만주 입국자를 포함한다면 해외동포 입국자는 약 154만 명이며 순수 북한 월남자는 약 64만 명이다. 모두 220만 명 정도에 달했다.459)그러나 다른 자료는 다음과 같은 통계수치(1945.10∼1947.12)를 제시하고 있다.

귀환전 거주지 귀환자의 수 남한 전체 인구¹중 귀환자의 비율
북한 859,930² 5.4%
만주 304,391 1.9%
일본 1,110,972 7.0%
중국 71,611 0.5%
기타 33,917 0.2%
2,380,820 15.1%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보≫(1948년)Ⅲ-19쪽.
 1. 1945년 5월 현재 남한 전체 인구 1,580만 명 기준.
 2. 표시된 숫자 중 388,694명은 북으로부터의 피난민이고 나머지 60%는 남 한이 고향임.

해외동포 입국자 일본 입국자 중국 등 기타 입국자
1,117,819 102,208 1,220,627
월남자 북한 월남자 북한경유 중국·만주월남자
648,784 320,231 969,015

<표 6>해방 후 3년간(1945. 8. 15∼1948. 12. 31) 유입된 귀환동포 규모 (단위:명)

통계청,≪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사회상≫(1993), 1∼4 및 9∼11쪽을 이용하여 작성.

 해방과 더불어 국내로 대거 돌아왔던 이들이 당시 사회에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 커밍스는 해방 직후 귀환동포의 유입으로 인해 인구가 급증했던 지역과 그 지역의 급진성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귀환동포의 유입이 그 지역의 인민위원회 활동이나 좌파활동과 관련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귀환동포 가운데는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북한체제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행했던 토지개혁으로 인해 남한으로 내려왔던 사람들도 있었다. 위의 통계로 미루어 볼 때, 그 성향상 우파 지향적인 이들의 규모는 몇 십만 명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환동포들은 급진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그들은 지방인민위원회 활동이나 좌파 활동에 적절한 토양을 제공했던 것이다.460)해방 후 인구유입과 그 지역의 급진성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커밍스의 분석에 대해서는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355∼359쪽 참조.

 그렇다면 해방과 더불어 고향과 조국으로 대거 몰려들었던 그들은 누구이며, 왜 급진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는가.

 해방 후 대거 유입된 귀환동포들의 대부분은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자신의 고향과 조국을 등지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첫 해외 이주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일제하의 토지집중화 과정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토지를 상실했던 빈농들은 자신의 고향을 등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후 일제의 전시공업화가 추진되었던 1930년대 이후, 그리고 전시체제가 본격적으로 구축되었던 1940년대의 일제 말에 들어와 다시 대대적인 주민이동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는 주로 북한지역에서 추진되었던 군수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거나 징병·징발 등 일제의 전시정책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461)브루스 커밍스, 위의 책, 58∼65·105쪽. 이렇게 일제식민통치 기간에 자신의 고향과 조국을 떠났던 그들이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고향과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국에 안전하게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졌으며, 물질과 지위의 상실을 겪었고, 종종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접촉했고, 살던 시골마을을 넘어선 더 큰 세계를 보았던”462)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역,≪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작과 비평사, 2001), 257쪽.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공업에 투입되었다가 한국의 농촌으로 다시 뱉어진”463)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104쪽.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자신의 고향과 조국에 다시 돌아왔던 그들에게 고향과 조국이 그 어떤 대책도 제공하지 못했을 때, 불만에 찬 그들은 급진적 운동에 휩쓸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귀환동포문제와 더불어 미군정기 사회의 혼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또 하나의 문제는 식량문제였다.

 1930년대의 일제시기 쌀·보리·밀·콩 등 조선의 순식량용 곡물생산량(1930년∼1937년의 8년 평균)은 2,971만 8천 석으로, 이는 당시 인구 2,430여만 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1인당 1.22석에 해당하는 규모였다.464)김종범,≪조선 식량문제와 그 대책≫(돌베개, 1984, 복간본. 같은 제목의 원본은 1946년에 발간됨), 19∼20쪽. 물론 당시의 쌀 생산량 약 2천만 석 가운데 약 800∼1,000만 석과 콩 생산량 중 150만 석 정도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반면 이를 보충하기 위해 만주 조(粟)가 약 100만 석 그리고 안남미가 약 100만 석 정도 유입되었다는465)김종범, 위의 책, 21·33쪽 및 통계청, 앞의 책, 28쪽 참조. 점을 감안할 때, 1인당 분배 가능량 1.22석의 절반 이상은 잡곡으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 같은 일제 치하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적인 식량 공출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식량사정이 열악했음에도 그것이 대량 기근사태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은 식량의 유통과 분배에 대한 일제의 강력한 전시 통제정책이 실시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족한 양이었지만 일제의 전시 통제정책은 최소한의 배분을 보장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 후 남한의 식량사정은 어떠했는가. 다음의<표 7>은 해방 후 남한의 식량생산 규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규모 역시 일제시기에 비해 충분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으로의 쌀 유출이 없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 생산이 북한지역에 치우쳤던 잡곡의 부족 그리고 급속히 증대했던 남한인구 등의 요인에 의해 남한의 식량사정은 압박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분 잡곡¹ 인구수²(명) 1인당 생산량(쌀+잡곡) (석)
1945 12,836 6,931 19,767 16,873,277 1.17(0.76+0.41)
1946 12,050 7,421 19,471 19,369,270 1.01(0.62+0.38)
1947 13,850 6,503 20,353 19,886,234 1.02(0.69+0.33)

<표 7>해방 후 남한의 식량 생산량 (단위:1,000석)

통계청,≪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사회상≫(1993), 27∼28쪽을 이용하여 작성.
 1. 잡곡은 보리·밀·조·옥수수·콩 포함한 것임.
 2. 인구수는<표 5>를 참조할 것.

 해방 후 미군정기 동안 식량문제는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식량이 부족했던 당시의 현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식량문제로 인한 사회적 혼란의 보다 큰 원인은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에 있었다. 부족한 식량에 대한 일제의 강력한 통제정책은 최소한 대량의 기근사태를 면할 수 있게 해주었던 반면, 아무런 준비없이 임시처방적으로 실시했던 미군정의 식량정책은 심각한 식량부족사태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미군정은 군정 초기 미곡 등 식량에 대한 자유매매·자유곡가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식량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한 현실에서 식량에 대한 통제정책의 전면 해제는 식량수급에 대한 일대 혼란을 야기시켰다. 식량에 대한 자유시장정책의 실시에 따라 미곡에 대한 매점매석이 횡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쌀값이 폭등하여 시장에서 쌀이 자취를 감추는 사태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즉 심각한 물자부족의 현실에서 미군정에 의해 도입되었던 자유시장정책은 균등한 분배가 아니라 특정인의 매점매석에 의한 심각한 식량부족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식량부족사태에 직면한 미군정이 1946년 2월<미곡수집령>을 발동, 미곡의 강제수집에 나섰기 때문이다. 나아가 미곡 강제수집정책은 같은 해 여름 하곡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그러나 시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강제 할당되고 그 수집이 강요되었던 미군정의 이 같은 정책은 농민들의 불만과 원성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당시 농민들에게 일제 말의 식량 공출을 연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던 농민들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식량수집의 저조한 실적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던 식량배급정책은 도시주민들의 불만을 드높였다. 1946년에 발생했던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의 한 배경에는 농촌과 도시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던 바로 이 같은 식량문제가 작용하고 있었다.466)미군정기 식량문제에 대해서는 강만길, 앞의 책, 214∼217쪽 및 정해구,≪10월인민항쟁 연구≫(열음사, 1988), 89∼9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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