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1. 미군정기의 사회
  • 2) 미군정기의 사회갈등
  • (1) 노동문제

(1) 노동문제

 1946년 11월 5∼6일, 경성(서울)의 중앙극장에 17개의 전국적 산업별 단일노조를 대표하는 515명의 대의원이 모여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이하 전평)를 결성하였다. 결성대회<선언>은 “8·15 이후 전국 각 산업 중요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운동은 자연발생적·지역적·수공업적 혼합형의 조직체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이것을 목적의식적 지도에 의해 전국적으로 정연한 산업별적 조직으로 체계화·강력화시켜 … 이 여러 개의 산업별 단일노동조합이 총집결함”으로써 전평이 결성되었음을 밝혔다. 또한 이 대회는 최저임금제의 확립, 8시간 노동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급 등 20개조에 달하는 ‘일반 행동강령’을 제시했다.467)민주주의민족전선 편,≪해방조선≫Ⅰ(과학과 사상, 1988, 이 책Ⅰ·Ⅱ는 민주주의민족전선 편,≪조선해방 일년사≫, 문우인서관, 1946의 복간본임), 194∼196쪽. 이로써 해방 직후 아래로는 노동대중의 분출하는 요구를 대변했던 한편 위로는 좌파진영의 가장 강력한 대중조직으로서 미군정 정책과 대치해 나갔던 전평 주도의 노동운동은 본격적으로 그 막을 올렸다.

 이 같은 전평의 등장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전평 노동운동의 급속한 발전이다. 결성 당시 전평은 그 산하에 215개의 지부(광산 제외)와 1,194개의 분회에 21만 7,073명의 조합원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3개월 뒤인 1946년 2월 15일 시점에서는 235개의 지부 및 1,676개의 분회에 57만 4,479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468)민주주의민족전선 편, 위의 책, 193쪽;≪전국노동자신문≫, 1945년 11월 16일. 해방 후 6개월 만에, 그리고 결성 후 3개월 만에 이 정도까지 확대된 전평의 성장은 그 유례를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이 규모는 남북한을 합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시점에서 남한만의 조합원수 역시 31만 5,100명에 이르고 있었다469)안태정,≪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연구≫(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01), 91·93쪽.는 점은 남한 노동운동의 성장이 매우 빠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북한의 조직이 독립해 나감으로써470)1945년 11월 30일에 전평 북조선총국이 결성되었고, 이는 1946년 5월 24일 북조선직업총동맹으로 발전됨으로써 북한의 조직은 남한의 전평으로부터 독립해 나갔다. 전평은 남한만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 5월 10일의 시점에서 남한 전평의 조합원수는 46만 7천 명(합동노조 포함시 60만 명)까지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471)HQ. HUSAFIK, G-2 Weekly Summary, No. 43, 1946년 7월 10일.

 해방 직후 남한에서 노동운동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조직화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일제의 패망으로 야기되었던 사회경제적인 혼란에 기인한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공장 폐쇄, 조업 단축, 실업 및 전재민의 증가, 물가 앙등과 이로 인한 실질 임금의 감소 등 제반 혼란은 아래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운동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특히 공장 및 직장 폐쇄, 조업 단축 등은 노동자자주관리운동과 해고반대투쟁 그리고 퇴직금 요구 투쟁 등 자연발생적 노동운동을 야기하였다.

 다음으로 당시 노동운동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원인은 일제하 노동운동의 영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제하 노동운동의 전통 속에서 지하조직을 통하여 해방 당시까지 이어졌던 노동운동의 영향과 해방과 더불어 이루어졌던 다수 노동운동가들의 출옥은 해방 직후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했던 노동운동을 목적의식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다수의 인적 자원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 해방 후 파죽지세로 발전하던 노동조합운동은 이 지하조직과 해방 후 출옥한 직업적 운동가가 기본부대가 되어 공장·기업소·광산 등 각 사업장으로 총진격하여 각지에 산재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분산적·종파적·기형적·직업별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산업원칙에 입각하여 목적의식을 가지고 지도하여 조직을 정비하였다. 또한 미조직지대의 조직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민주주의민족전선 편,≪해방 조선≫Ⅰ, 과학과 사상, 1988, 192쪽).

 그러나 전국적인 산업별 노동조합의 결집체로서 전평의 결성을 가져왔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당의 외곽 대중조직으로서 전국적인 노동운동조직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좌파세력, 특히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계열의 의도적 노력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 결성과 더불어 각종 대중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는데472)노동운동을 비롯한 각종 대중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조선공산당 박헌영 계열의 의도는 ‘8월테제’, 즉 조공 중앙위원회가 1945년 9월 20일 채택했던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에서 확인할 수 있다(<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김남식 편,≪남로당연구 자료집≫1,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4, 8∼21쪽 참조). 노동운동의 조직화는 노동자 대중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최우선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해방 직후 각 공장에서 조직된 조합이 자연스럽게 산별노조로 확대 발전되어 가는 가운데, 이 같은 각 산별노조를 연결 통일하는 중앙집권적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던 1945년 9월 26일 전평 준비위원회473)中尾美知子,≪해방 후 전평 노동운동≫(춘추사, 1984), 42쪽.는 박헌영 계열의 바로 이러한 의도에 따른 결과였다. 이를 반영하듯, 전평 결성대회 당시 대회는 “조선 무산계급의 수령이요 애국자인 박헌영 동무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낼 것”과 “조선 무산계급 운동의 교란자 이영 일파를 단호히 박멸할 것”을 긴급동의로 채택하기도 했다.474)김남식,≪남로당 연구≫(돌베개, 1984), 65쪽.

 그렇다면 결성 이후 전평의 노동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그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할 때 그 노선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표 8>참조).

시 기 초기(45. 8∼46초) 중기(46초∼47중) 후기(47중∼48. 8)
정치적
상황의 전개
인공 수립↔미군정 실시 제1차 공위 ‘신전술’ 단정수립↔단정반대
전평의
운동노선
노동자공장관리운동 산업건설운동 9월총파업→전평의 불법화

<표 8>미군정기 정치상황의 전개와 전평의 운동노선

정해구,<미군정과 좌파의 노동운동>(한국산업사회연구회 편,≪계간 경제와 사회≫, 까치, 1989), 121쪽.

 위의<표 8>은 정치적 상황이 바뀔 때마다 전평의 운동노선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제1차 미·소공위가 진행되자 전평은 기존의 노동자공장관리운동보다 산업건설운동을 전면에 내걸었으며,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미군정의 탄압에 대항하여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하자 전평은 총파업 전술로 이에 호응하였다. 이는 전평의 운동이 비록 아래로부터의 노동대중의 요구에 부응했을지라도, 그 노선 변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각 정치적 상황에 따른 전평 노동운동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475)이하 전평 노동운동의 구체적 전개과정에서 대해서는 정해구,<미군정과 좌파의 노동운동>(한국산업사회연구회 편,≪계간 경제와 사회≫, 까치, 1989년 봄호) 참조. 우선 해방 직후부터 1946년 1월 중순 전평 지령 6호의 ‘산업건설운동을 중심으로 한 당면투쟁에 관한 지령’이 나오기까지 전평이 추구했던 중심적인 노선은 ‘노동자공장관리운동’이었다.476)노동자공장관리운동에 대해서는, 현훈이≪전국노동자신문≫에 4회에 걸쳐 썼던<노동자 공장관리에 대해서>를 참조할 것(≪전국노동자신문≫, 1945년 11월 16일, 12월 1일, 1946년 1월 1·16일). 이 노선은 인민정권이 수립되어 국유화시키기 이전까지 일인 및 민족반역자의 공장을 접수하여 이를 노동자 스스로가 맡아 관리한다는 것으로서, 좌파진영이 추구했던 인민정권의 물적기반 구축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 노선이 처음부터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던 것은 아니다. 전평 결성 이전에는 노동자자주관리운동, 해고반대투쟁, 퇴직금 요구 투쟁 등 자연발생적 노동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전평의 결성과 더불어 이들 운동은 전평의 지도하에 노동자공장관리운동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주축이 되어 공장을 관리하고자 했던 이 같은 시도는 이를 통한 좌파 영향력 강화에 대한 미군정의 우려를 증대시켰다. 그리하여 그 초기에 일인의 사유재산에 대해 유동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던 미군정은 전평 주도의 노동자공장관리운동에 직면하자 그 태도를 변화시켰다. 즉 미군정은 이제까지의 그들의 입장을 변경, 일제의 국공유 재산뿐만 아니라 일인 사유재산까지 전면 접수하는 한편 이들의 관리를 자신들이 선정하는 관리인들에게 맡기는 정책을 취했던 것이다.477)일인 사유재산에 대한 미군정의 이러한 정책 변화에 대해서는 中尾美知子, 앞의 책, 29∼34쪽 및 63∼67쪽 참조. 이 같은 상황에서 전평의 노동자공장관리운동과 미군정의 정책은 정면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좌파진영은 가능한 한 미군정과 갈등을 야기시키려 하지 않았다. 미군정에 정면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아직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에 도전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양보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5년 11월 30일 전평이 지시한 ‘산업건설협력 방침’478)‘산업건설협력방침’에 천명된 전평의 태도는 다음과 같았다. ①파업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②한국 자주독립을 원조하는 미소 양군에 협력한다. ③양심적 민족자본가와 협력하여 공황을 타개한다. ④비양심적 악덕모리배를 배격한다(中尾美知子, 위의 책, 61∼63쪽).은 바로 이 같은 양보의 결과였다.

 나아가, 이 같은 ‘산업건설협력 방침’은 1946년 1월 중순의 산업건설운동노선, 즉 ‘산업건설운동을 중심으로 한 당면투쟁에 관한 지령’으로 이어졌는데, 그것은 당장 물자가 부족한 현실에서 일단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자가 산업건설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479)‘산업건설운동’에 대해서는 中尾美知子, 위의 책, 79∼82쪽 참조. 그러나 전평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적인 데에 있었다. 즉 한반도 정부수립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가 공표됨에 따라 앞으로 개최될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좌파 진영은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고, 이를 위해 일반 대중의 지지뿐만 아니라 양심적 민족자본가와의 협력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전평이 노동운동을 방기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노력을 ‘對악덕관리인 투쟁’에 집중시켰던 한편, 당시에 문제가 되고 있던 식량문제와 관련하여 ‘쌀 획득투쟁’도 동시에 전개해 나갔다.480)이에 대해서는 中尾美知子, 위의 책, 82∼97쪽 참조.

 이상과 같은 해방 직후 전평의 노동운동의 전개과정을 통해 보면, 노동자공장관리운동이 산업건설협력방침을 거쳐 산업건설운동으로 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대중의 상황이 호전되었음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부수립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좌파 내부의 전술 변화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따라 곧 미·소공동위원회 개최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초기의 인민정권 수립운동은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 운동으로 전환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변화는 전평의 노동운동노선을 보다 온건하고 협조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전평은 온건노선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었던 사태는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아갔다. 1946년 5월초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과 동시에 좌파 진영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은 강화되고 우파의 테러반격 또한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6년 중반에 들어 좌파 진영은 심각한 선택의 딜레마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들은 미군정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든지, 아니면 기존의 온건노선을 유지하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평 내부에도 반영되었는데, 그들은 강온 전술의 선택 여부를 둘러싸고 격심한 내부 논쟁에 휘말렸다. 한쪽에서는 총파업의 강경 전술이 주장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산업건설운동의 유효성이 주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럴 즈음 노동쟁의 현장에서 분출했던 아래로부터의 압력 또한 점차 가중되고 있었다. 공장 및 직장에서의 갈등이 심화되고 노동자들의 생활여건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태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을 오히려 전평 지도부가 억제하고 있는 형국으로 변해갔다. 결국 이러한 상황 속에서 7월 말 조선공산당 내부에서 박헌영 중심의 강경세력은 ‘신전술’, 즉 ‘정당방위의 역공세 전술’481)‘정당방위의 역공세’, 즉 ‘신전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일원,≪남로당의 조직과 전술≫(세계, 1984), 30∼32쪽 참조. ‘신전술’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김남식, 앞의 책, 235∼236쪽).
① 지금까지 협조, 합작노선을 진보적으로 전환.
② 극동에서 중공당과 일본공산당들과의 연계하에 반미운동 적극화.
③ 북조선과 같은 개혁을 요구.
④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폭로하고 투쟁을 적극적 공세로 전환.
⑤ 정권을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넘기는 투쟁 전개.
⑥ 희생을 각오하고 투쟁할 것.
을 채택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제까지 온건정책을 유지해왔던 전평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파업 투쟁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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