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1. 미군정기의 사회
  • 3) 9월총파업과 10월항쟁
  • (1) 9월총파업

(1) 9월총파업

 9월 23일 0시를 기해 7천여 명의 부산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24일에는 경성을 비롯한 전국의 철도노동자 4만 명이 이에 합세하였다. 뒤이어 며칠 사이에 출판·체신·섬유·전기 등 각 분야 노조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이처럼 9월총파업은 부산의 철도파업에서 시작되어 전국의 전 산업분야에 걸쳐 확산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파업의 확대 속에서 24일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26일에 ‘총파업선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밝혔다.489)<자료 총파업선언서>(≪전국노동자신문≫, 1946년 11월 22일).

一.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一.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一. 전재민·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一. 공장 폐쇄, 해고 절대 반대.

一.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一. 일체 반동테러 배격.

一.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一. 민주주의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를 즉시 철회하라.

一.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라.

一.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一. 학문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안을 즉시 철회하라.

一. 해방일보·인민보·현대일보 기타 정간 중인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위의 요구조건들은 사회경제적인 사안뿐만 아니라 제반 정치적인 요구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사안들을 거의 망라하고 있는데, 이는 총파업 발발의 복합적인 원인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당시 극도의 혼란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사회경제적 상황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야기되었던 식량부족·물가등귀·귀환동포로 인한 전재민문제·실업문제 등은 당시의 시점에서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공장 폐쇄·해고·각종 임금상의 불이익 등에 항의하여 총파업 투쟁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9월총파업 발발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운수부 종업원 25%의 감원과 월급제에서 일급제로의 변경 등의 조치를 취했던 미군정청 운수부 정책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다. 이 같은 미군정청 운수부의 조치에 대항하여 철도국 경성공장의 노동자들은 9월 13일 가족수당 및 물가수당 지급, 일급제 반대, 식량 배급, 해고 반대 등을 내세우며 태업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총파업에 돌입할 것임을 경고하고 나섰던 것이다.490)이에 대해서는 中尾美知子, 앞의 책, 114∼115쪽 참조. 요컨대,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군정청 운수부 정책에 대한 철도노동자들의 항의에서 비롯되었지만, 당시의 악화된 사회경제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전 산업 분야로 급속히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9월총파업 투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당시의 악화된 사회경제적인 조건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총파업이 미군정과 강경 좌파진영의 충돌이라는 정치적인 원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46년 5월 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미군정은 강경 좌파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따라 범좌파진영은 미군정과의 타협을 주장했던 여운형 중심의 온건세력과, 정면 대결을 주장했던 박헌영 중심의 강경세력으로 분열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추진되었던 조선공산당·인민당·신민당 등 좌파 3당의 통합문제는 주도권 문제를 둘러싸고 좌파진영의 내부 분열을 더욱 격화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강경 좌파세력은 미군정의 탄압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또 내부 투쟁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보다 강력한 투쟁에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 1946년 7월 26일 취해졌던 조선공산당의 ‘정당방위의 역공세’, 즉 ‘신전술’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그것은 한편으로 좌파세력이 “수세에서 공세로, 퇴거에서 전진으로 돌진”하기 위해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자 했던 시도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내부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강경 좌파세력의 시도였던 것이다. 총파업 전술은 바로 박헌영 중심의 강경 좌파세력이 이 같은 ‘신전술’의 맥락 속에서 모색했던 대중투쟁의 일환이었다.

 총파업과 관련하여 원래 그 시기는 농민들의 추수투쟁과 연결시키기 위해 10월경으로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좌파계열의 신문인≪인민보≫·≪현대일보≫·≪중앙신문≫에 대한 미군정의 정간조치에 이어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위로부터 지시에 의해 9월 말로 앞당겨졌다.491)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남식, 앞의 책, 236∼237쪽 참조.

 아무튼 9월 23일 시작된 9월총파업은 10월 초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24일 경성의 철도노조가 파업에 전면 동참한 가운데 25일에는 출판노조가 이에 합세했고, 같은 날 대구종업원 4백여 명 역시 파업에 돌입했다. 27일에는 경춘철도 종업원 2천여 명이 파업에 들어간 것을 필두로 경성의 각 전화국과 우편국, 부산의 남전, 그리고 3천여 명의 대구 섬유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28일에는 해원노조 1만여 명이 태업에 들어갔고 이 태업은 10월 3일 파업으로 이어졌다. 각 분야에 걸쳐 전개되었던 이 같은 파업을 통해 전국적으로 약 25만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참여했으며, 경성에서만도 철도노동자를 비롯하여 295개의 공장 및 직장에서 노동자 3만여 명과 사무원 6천여 명이 참여하였다.492)조선통신사,≪조선연감≫(1948년), 257∼258쪽.

 그러나 전평 주도의 이 같은 대대적인 총파업 투쟁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단호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총파업 투쟁이 순수한 노동운동의 결과라기보다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좌파세력의 정치적 도전이라 판단했다. 그리하여 미군정은 총파업에 대한 물리적 분쇄에 나섰는데, 9월 30일 3천여 명의 경찰 및 우익청년들을 동원하여 용산 철도파업단에 대한 공격을 성공시켰고, 이는 총파업 분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군정청 운수부장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상황은 마치 우리가 전투에 돌입한 것과 같았다. 우리는 파업을 분쇄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혹시 몇몇 죄 없는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시 외곽에 정치범 수용소를 세워 감옥이 모자랄 때에는 그곳에 파업 노동자들을 수용했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전쟁으로 생각했었다. 우리는 상황에 대해 그런 식으로 대응했다(Stewart Meacham,<미군정하 노동정책-한국 노동사정 보고서>,≪한국 노동문제의 상황과 인식≫, 풀빛, 1986, 264쪽).

 9월총파업이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라기보다는 좌파진영의 정치적 공세로 판단했던 미군정의 이 같은 강력한 탄압에 의해 파업은 10월 초에 들어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또한 대구에서의 총파업은 지역주민의 항쟁으로 이어졌는데, 대구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던 이 같은 항쟁은 사태의 초점을 또 다른 차원, 즉 민중항쟁의 차원으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9월총파업은 이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에도 1947년 3·24 24시간총파업, 1948년의 2·7총파업 및 5·8총파업 등 좌파진영에 의한 여러 차례의 총파업이 전개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 파업들은 좌파 노동운동의 상승기에 분출했던 운동이 아니라 하강기에 등장했던 운동이었고, 그런 만큼 대중적 노동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투쟁에 가까웠다. 더구나 전평의 노동운동은 “정치색을 띤 노동조합은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1947년 6월 7일 미군정의 정책에 의해 조기에 불법화되었다. 따라서 9월총파업 이후 전평 중심의 좌파 노동운동은 미군정의 집중적인 탄압 속에서 급속히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미군정과 경찰의 후원에 의해 점차 그 영향력을 강화시켰던 우파진영의 대한노총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해갔다.

 요컨대, 전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좌파진영의 노동운동은 해방 직후 짧은 기간 동안에 유례없는 급성장을 이룩했던 한편, 9월총파업 이후에는 급속도로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직후 전평 중심 노동운동의 급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들의 불만을 누적시킬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혼란과,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들을 동원하고 조직화시킬 수 있었던 좌파 노동운동의 리더쉽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치적으로 좌파진영, 특히 강경 좌파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미군정의 강력한 탄압을 야기시켜 그들의 조기 몰락을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즉 전평의 노동운동은 미군정에 대한 강경 좌파세력의 전술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 전술이 미군정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정책을 취했을 때, 대중투쟁의 최전선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이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분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전평 중심의 노동운동은 급속한 약화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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