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1. 미군정기의 사회
  • 3) 9월총파업과 10월항쟁
  • (2) 10월항쟁

(2) 10월항쟁

 9월 23일의 부산 철도파업을 시작으로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그리고 각 분야로 확산되었을 때, 대구에서도 철도파업을 필두로 우편국·섬유산업·출판노조 등이 이에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30일 현재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의 총파업에는 30여 개 업체 총 4,000여 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구의 총파업은 전평의 대구 지역조직이라 할 수 있었던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주도했는데, 그들은 27일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이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대구지역의 총파업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 대구지역의 총파업은 다른 지역의 총파업이 경찰에 의해 분쇄되거나 자연적으로 약화된 데 비해, 이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10월 1일 경찰의 발포로 군중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대구시민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발생, 사태는 파업 차원을 넘어 민중항쟁의 차원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493)대구에서의 총파업과 항쟁에 대해서는 정해구, 앞의 책, 102∼113쪽 참조. 이후 10월항쟁 설명과 관련하여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그 설명은 이 책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나아가, 대구에서 전개되었던 항쟁은 며칠 사이에 경북의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대구파업이 대구와 경북지역의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던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9월총파업 발생의 동일한 원인에서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미군정은 강경 좌파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켰고 이에 대응하여 강경 좌파세력은 미군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신전술’의 새로운 방침을 채택했다. 총파업은 좌파진영의 이러한 전술 변화 속에서 모색되었고, 따라서 항쟁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인 정치적 설명만으로 항쟁으로의 발전 전체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항쟁의로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원인은 당시 대구와 경북지역이 직면했던 사회경제적인 상황, 특히 귀환동포문제와 식량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다음<표 11>은 당시 귀환동포의 국내 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북의 귀환동포 규모는 경남과 충남에 이어 3번째로 높았다. “고향이라고 찾아와도 굶어 죽겠으니 가다가 죽으나 여기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대구역을 떠나는 이재민이 1일 100여 명이나 되었다는 보도494)≪대구시보≫, 1946년 4월 13일.는 당시 대구 귀환동포의 처지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같은 귀환동포의 열악한 처지가 항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명 경기 충북 충남 경북 경남 전북 전남 강원 서울 제주
인원수 142 126 360 312 393 236 293 87.3 255 22 2,226.3

<표 11>귀환이재민의 국내 분포 (단위:1,000명)

≪동아일보≫, 1947년 1월 11일.

 다음으로 대구·경북에서의 민중항쟁은 식량문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군정은 1946년 2월 미곡의 강제매입을 시행했고, 이에 3월 대구 미군정청은 미곡의 불법운반과 자유매매를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해 여름에 발생했던 콜레라는 그 방역대책을 위해 대구 주변의 교통을 차단시켰는데, 이는 대구 주변의 농촌에서 개별적으로 소량의 식량을 반입하여 근근히 생계를 연명해왔던 대다수 대구 주민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당시 대구에서 빈발했던 식량배급 요구의 항의사태는 당시 대구지역의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495)정해구, 앞의 책, 90∼92쪽.

 이상의 사태가 주로 대구지역에 해당되었던 문제라 한다면, 대구 주변의 농촌지역에서는 식량의 강제매입이 문제가 되었다. 다음의<표 12>는 1945년산 미곡수집과 1946년산 하곡수집에 대한 전국적인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구 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강원
1945년산
미곡수집
8.2 7.3 9.1 20.2 16.9 7.3 5.9 57.5 12.4
1946년산
하곡수집
62.5 70.4 42.6 69.6 11.0 74.4 41.4 142.8 48.0

<표 12>1945년산 미곡수집 및 1946년산 하곡수집 계획대비 실적 (단위:%)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보≫(1948년)Ⅰ-243쪽과 조선은행 조사부,≪경제연감≫(1949년)Ⅳ-35쪽을 이용하여 작성.

 <표 12>에 따르면, 경북지역의 1945년산 미곡수집 실적은 계획대비 7.3%에 그치는 것으로서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경북지역의 1946년산 하곡수집 실적은 계획대비 74.4%로서 강원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최고였다. 이것이 시사하고 있는 바는 경북 미군정청이 1945년산 미곡수집의 저조한 실적을 감안, 1946년산 하곡수집에 있어서는 계획량 달성을 위해 강력한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경북 미군정청은 하곡수집시 목표 달성을 위해 경찰을 총동원할 정도로 농민들을 강압했고, 때로는 하곡수집에 응하지 않는 농민들을 투옥하기조차 했다. 하곡수집과 관련된 경북 미군정청의 이 같은 강압적 태도가 10월항쟁 확산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496)경북지역에서 미군정청에 의한 강압적인 식량수집정책에 대해서는 정해구, 위의 책, 90∼99쪽 참조.

 다른 한편, 대구에서의 파업이 대구와 경북지역의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던 또 다른 원인은 이 지역 좌파세력의 유연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대구의 좌파진영은 보다 유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오히려 강력해질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우파들과 더불어 건국준비치안유지회·탁치반대공동투쟁위원회·대구공동위원회 등을 결성함으로써 9월총파업 및 10월항쟁 이전까지 3차례에 걸친 좌우합작적 연대를 성사시켰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이 같은 유연성은 역으로 미군정의 탄압을 피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고, 그 결과 미군정의 탄압으로 약화되었던 다른 지역의 좌파세력과는 달리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구파업의 민중항쟁으로의 발전이 좌파진영에 의해 의도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이 같이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대구·경북 좌파진영의 존재가 있었다.497)해방 직후 대구지방 정치의 전개에 대해서는 정해구,<해방직후 대구지방 정치의 전개>(≪역사비평≫1, 역사문제연구소, 1987) 참조.

 아무튼 10월 2일 저녁 이후 대구항쟁은 경북의 여타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항쟁은 경북지역 전체 22개 군 가운데 19개 군에서 발생하였다. 태백산맥 以東의 몇 개 군을 제외한 경북 전역에서 발생했던 이 항쟁에는 약 32만 명의 민중들이 참여했다. 항쟁을 통해 농민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그들이 가장 많이 요구했던 것은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의 제거였다. 또한 그들은 식량 및 생활난, 미군정 정책 비판, 좌익인사 구속에 대한 항의, 그리고 민주주의 등을 요구했다.498)정해구, 앞의 책, 148쪽. 즉 그들은 해방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뀌지 않는, 경찰로 상징되었던 체제의 현실에 분노했고, 귀환동포 및 식량문제 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악화되어 갔던 사회경제적 혼란상은 그러한 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쟁에 참여한 민중들에게 되돌아온 보복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유혈진압이었다. 대구항쟁 진압에 이어, 경북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약 3천 명의 경북 경찰력 이외에 충남경찰대 400명, 충북경찰대 300명, 경기경찰대 400명이 투입되었고, 충남의 국방경비대 2연대와 3·4관구의 미군도 투입되었다. 나아가 서울에서 내려온 우익청년단도 진압에 합세하였다. 따라서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사살, 체포되거나 도피하였고 아니면 적어도 항쟁에 참여했던 사실 자체를 숨겨야 했다. 또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마을로 내려오는 ‘산사람’이 되었다. 항쟁이 진압되었을 때 경북지역에서 군중 수백 명이 사망했고 7천여 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경찰측에서도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경북항쟁이 마무리될 무렵 항쟁은 경남지역으로 비화되었다. 경남에서는 10월 7일에서 14일까지 각지에서 다수의 항쟁이 발생했으나, 경북항쟁과는 달리 그것은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모습을 띠었다. 이어 10월 17일에서 19일 사이에는 충남의 서북부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10월 20일에서 22일 사이에는 경기 서북부의 38선 부근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이곳에서의 항쟁은 소규모의 인원이 경찰서나 지서를 “치고(hit)” 북으로 “빠지는(run)” 모습을 보였다. 10월 29일에서 11월 첫 주 사이에는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11월 29일에서 11월 4일까지는 나주와 화순을 중심으로 한 전남 중북부지역에서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하였다. 11월 7일 이후에는 해남을 중심으로 한 전남 남쪽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10월 1일 대구로부터 시작되어 이때까지 전국에 걸쳐 발생했던 10월항쟁은 12월 8일 전북 전주에서의 항쟁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499)타 지역의 항쟁에 대해서는 정해구,<경북지역 이외의 10월인민항쟁>(정해구, 위의 책, 제5장) 참조.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야기되었던 미군정기의 사회경제적 혼란과, 노동문제 및 농업문제 등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좌파 주도의 사회운동과 이에 대한 미군정 정책의 충돌은 결국 이렇게 9월총파업의 형태로, 10월항쟁의 형태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와 같은 폭발에는 정부수립을 둘러싼 미군정과 좌파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파업과 항쟁의 이러한 폭발은 문제의 해결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을 앞세운 미군정의 억압에 의해 그 폭발이 진압되고 분쇄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남겨진 문제는 반공을 앞세운 국가권력에 의해 사회에 남겨져 있는 좌파적 잔존 요소들을 척결하는 일이었다. 이후 미군정기 동안 행해졌던 것은 바로 그러한 작업들이었다.

<丁海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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