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2. 미군정기의 경제
  • 5) 금융·재정과 무역·원조
  • (1) 미군정기의 금융·재정

(1) 미군정기의 금융·재정

 해방이 되고 얼마 동안은 일제하의 온갖 통제물자가 일시에 시장에 범람함에 따라 물가가 하락한 일도 있었지만, 곧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하여 다음<표 15>에서와 같은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렇게 물가가 폭등한 것은 통화팽창, 생산·무역의 감소, 인구증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 도 1936년을 100으로 기준
1944년
1945년(8∼12월)
1946년
1947년
1948년
241
2,817
13,478
40,203
72,516

<표 15>서울시 도매물가지수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감≫(1949), Ⅳ부-159쪽.

 식민지하 전시경제의 1930년대 후반부터 통화량은 급격히 팽창하여 1944년에는 1936년의 15배를 넘어섰다. 그런데도 이 시기의 물가상승률은 겨우 200%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일제의 강력한 물가통제에 의해 물가상승이 잠복되었음을 의미하고 이것이 해방 이후 폭발된 셈이다. 게다가 8·15직후 일본인들의 철수와 관련하여 일제가 대량의 자금을 창출하였으며, 미군정기 동안에도 재정적자 등에 따라 약 4배에 가까운 통화량 팽창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는 모든 산업분야의 생산감소, 급격한 인구증가, 일제하 억압되었던 잠재수요의 폭발, 경제적 혼란을 틈탄 매점매석 등의 요인들이 결합되어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물가폭등으로 인해 민간의 저축성향이 하락하고 금융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대부분의 금융기관은 일단 미군정에 귀속되었고 은행들은 단기금융에 치중하고 중장기 산업금융은 미미한 상태였다.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은 통화신용에 관한 자주적인 통제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政府貸上金을 준비금으로 하는 사실상의 무제한 발행제도를 채택하였다. 미군정은 은행대출에 대해서는 자유여신한도제를 실시하여 일정액 이상을 초과하는 대출에 대해서는 재무부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요컨대 미군정의 금융정책은 금융통화체제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지 않았고, 막대한 재정수요를 통화남발에 의해 조달하는 한편 인플레이션을 다소 진정시키기 위해 자유여신한도제나 여신금리 인상과 같은 조치를 취하는 데 머물고 산업부흥을 위한 금융정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1945년 10월부터 총독부의 재정회계를 봉쇄하고 출발한 미군정의 재정은 항상 세출이 세입을 능가하는 적자재정이었고, 그것은 전적으로 조선은행으로부터의 차입금에 의해 보전되었다. 그리고 세출에서는 官業費·치안비·지방행정비가 주된 항목이었던 반면에 산업진흥을 위한 상무부와 농무부의 지출은 미미하였다. 이는 미군정이 정치·사회적 안정에 주력하면서 경제 재건에는 소홀했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세입에서는 조세수입의 비중이 얼마 안 되는 반면에 관업수입이 큰 비중을 점하였다. 특히 연초·식염 및 인삼에 대한 전매사업으로부터의 수입이 정부세입의 절반을 점하였다. 낮은 조세수입 비중은 생산의 위축과 세정의 미비에 따른 것이었다. 조세 중 稅收寄與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소득세였고 그 다음이 주세인 실정이었다.

 미군정하의 세법개정은 매우 빈번하였는데 지방세와 관세는 6차에 걸쳐 개정되고 소득세는 2차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빈번한 개정에도 불구하고 일제 말기에 무질서하게 확대되었던 조세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미군정의 세수증대 노력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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