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2) 미술
  • (2) 왜색과 민족미술

(2) 왜색과 민족미술

 해방과 더불어 미술계에서 제기된 가장 뜨거운 논의는 왜색의 탈피와 민족미술의 건설이었다. 회화상에서 왜색은 전통회화뿐만 아니라 서양화에서도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적되었다. 왜색의 침투는 특히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현저하게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2년에 창설된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는 1944년 막을 내릴 때까지 이 땅에서 유일한 신인 등용문이자 미술가들의 활동무대로서 기능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당시 조선인 미술가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 거주하고 있었던 일본인 미술가들도 참여하고 있어서 왜색의 침투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 장르에 걸쳐 출품자가 수적으로 대등하였기 때문에 왜색의 침투는 극히 무감각하게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회화인 동양화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화법과 일본화법의 구분이 비교적 쉽게 파악될 수 있으나 서양화를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는 대부분의 근대적 조형수업이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의 구분은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동양화 역시 일본에 유학한 미술지망생들이 일본화과를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당시 일본의 미술학교는 일본화과와 서양화과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동양화과는 없었다) 이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일본화법을 익힐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동양화에서의 왜색은 먼저 채색기법과 윤곽선 없이 흐리게 처리하는 朦朧體에서 두드러졌다.

 尹喜淳은≪조선미술연구≫속에서 왜색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 양화에 있어서 일본 여자의 의상을 연상케 하는 색감이라든지 동양화의 일본화 도안풍의 화법과 도국적 필치라든지 이조자기에 대한 다도식 미학이라든지 … (윤희순,≪조선미술연구≫, 서울신문사, 1946).

 이상의 지적에 보이는 왜색의 실체파악이 색채와 기법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화의 성립이 저들의 장식적인 장벽화의 전통을 근대적 리얼리즘과 접목시킨 것으로 짙은 채색기법은 왜색의 대표적 항목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沒線彩畵의 수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선묘의 배제와 도안풍이 왜색의 특징적인 요소로 꼽힌다.

 동양화에 비해 서양화에 있어 왜색의 특징을 가늠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서양화를 일본을 통해 배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서양화 속의 왜색 요소를 점검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심미적 태도, 감성의 문제로 확대되어 질 수밖에 없다. 윤희순이 지적한 바 ‘일본 여자의 의상을 연상케 하는 색감’이라는 것은 다분히 감성적인 측면에서의 지적이며 그럼으로써 때로 추상적 미궁으로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이 문제는 해방 직후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라기보다 이후 오랫동안 우리가 점검하고 풀어나가야 할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왜색이 완전히 극복되었는지, 우리 미술 속에 일본적 잔재가 없는 것인지는 아직도 우리 미술의 주요한 논의로서의 실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왜색을 탈피한 빈자리에 채워 넣어야 할 대안은 다름 아닌 민족미술이다. 민족미술의 건설은 새 나라 건설이라는 지상과제와 맞물려 미술계의 뜨거운 과제의 하나였다. 이에 대한 많은 제안이 있었다. 많은 논의가 우리 문화(전통)와 관계된 것이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언급 중 대표적인 것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우리의 고유문화의 전통을 진실로 해방시키고 다시 그 장단을 검토함으로써 그 장처를 계발 육성시켜 가는 일면에 과거 조선이 가졌던 봉건적 문호를 개방하야 세계의 선진문화사상의 장처도 동시에 이를 수입함으로써 신세계가 요구하는 가장 진실한 문화, 가장 항구적 생명을 가진 문화를 이 땅에 확립시킬 수 … (김주경,<문화건설의 기본방향>,≪춘추≫, 1946년 2월).

… 조선의 자연과 민족성의 특성을 먼저 검토하여야 … (김주경,<조선미술의 세계적 지위>,≪신문학≫, 1946년 4월).

… 나는 조선민족의 문화가 타민족의 문화에 비교하여 월등히 우위를 점령한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 민족의 문화가 뿜는 향기가 타민족의 그것과 판이한 특색이 있기 때문에 우리 민족문화로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요 또 세계문화의 대열에 병립할 수 있는 소이를 말할 따름입니다 … (김용준,<민족문화문제>,≪신천지≫, 1947년 1월).

… 깊은 애정과 이해와 체득과 그리고 진보적인 의식획득 없이 오직 형식상으로 조선 의상을 묘사하였다고 민족미술이 될 수 없으며 농민 노동자를 그렸다고 프롤레타리아 미술이 될 수 없는 것 … (윤희순,<고전미술의 현실적 의의>,≪경향신문≫, 1946년 12월 6일).

 민족미술 건설은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점이 위의 인용들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새로운 민족미술은 어떠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어야 하느냐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찾을 수 없다. 해방 3년을 지나면서 한 吳之湖의 다음 언급도 이를 의식한 것이다.

미술운동의 근본적 지표인 신민족미술의 수립은 상념적으로 그 문턱에 발을 디뎌놓았을 뿐이오 오직 명확한 방법론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와 병행되어야 하는 그 실천활동의 하나로서의 미술의 대중화 문제도 관념적으로 초조할 뿐이오 실천적 추진을 갖지 못하고 8·15변혁의 제3년을 맞이하였다(오지호,<해방이후 미술계 총관>,≪신문학≫, 1946년 10월).

 그나마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을 제안한 경우는 다음 두 예에서 찾을 수 있다.

30여 년간 몰각되다시피 한 고전의 새로운 탐구와 검토가 제의되는 것이다. 단순한 복고주의로서 고전을 우상화하여 향수의 회상거리를 만들어 버리면 거기서는 감상적인 탄식과 이미테이션 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이것은 골동취미에 불과하는 것이다. 우리는 겸재와 혜원의 작품에서 이조 봉건사회의 모순과 특질과 또 그들의 혁명적인 정신과 묘사의 기법에서 많은 영양소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은 현대작가의 현실적인 창작에 큰 시사와 교훈이 될 수 있음을 확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탐구의 수법이 기계적인 모방에서 탈출하여 현실의 역사성에 입각한 비판적인 것이고 또 시대감각에 예민한 작가라면 사수도와 석굴암·청자·도암초상·투견도 등에서 가지가지의 영양소를 얻을 수 있고 또 이것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윤희순,<고전미술의 현실적 의의>,≪경향신문≫, 1946년 12월 6일).

첫째는 한민족미술이 될 수 있는 제일 요건은 그 민족 전체에 공통되는 감성에 쾌적한 것이라야 한다. 조선사람은 예로부터 명랑하고 선명한 색채를 좋아하고 요구한다. … 그러므로 새로운 미술은 이와 같은 조선인의 생리적 감각과 감정적 요구에 적응할 것을 제일 요건으로 해야할 것이다.

둘째, 민족이 어떤 소수인을 지칭함이 아니라면 민족미술이란 본질상 국민예술인 것이다. 국민의 생활 감정을 반영하고 그들의 생활 의욕을 앙양하는 예술, 즉 국민의 벗이라야 할 것이다(오지호,<해방이후 미술 총평>,≪경향신문≫, 1946년 12월 5일).

 앞선 윤희순의 제안은 새로운 민족미술의 탐구가 고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단순히 과거 작품을 재현해 놓자는 복고적 취향은 안되고 과거 작품 속에서 영양소를 채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의 역사성에 입각한 비판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대 현실에 입각해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민족미술의 실체를 가능하게 하는 일임을 완곡하게 표명해주고 있다.

 뒤의 오지호의 제안은 한국인의 감성, 보편적 감각의 토대에서 새로운 민족미술을 세워야 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우리 민족을 천성적으로 건강하고 고급한 감각인 명랑하고 선명한 색채를 좋아함을 강조하면서 신민족미술이 전체 국민이 호응하는 감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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