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2) 미술
  • (3) 미술의 대중화와 생활화

(3) 미술의 대중화와 생활화

 왜색 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에 이어 미술계의 현안으로 자주 거론된 것은 계몽적인 차원의 미술 대중화와 생활화였다. 이는 미술이 전문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상아탑의식을 벗어나 미술을 적극적으로 생활 속에 침투시키려는 일종의 문화앙양의 절실성에서 기인된 것이다. 조선미술가동맹과 조형예술동맹이 발표하고 있는 강령 가운데 민족미술 건설과 함께 이 점이 천명되고 있다. “미술의 인민적 계몽과 후진의 적극적 육성”, “미술의 계몽운동과 아울러 일반대중 생활에 미술을 침투시킴에 노력함” 등이 이들 단체가 내놓은 강령의 하나이다. 오지호 역시 해방 이듬해 발표한 미술계 동향에 대한 총평 가운데 신민족미술의 수립과 더불어 실천되어야 할 활동의 하나로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술의 대중화 문제도 관념적으로 초조할 뿐이오 실천적 추진을 갖지 못하고”라는 대목은 미술이 전문가 전용물이라는 인식을 벗어나 미술의 대중화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시사하고 있다.

 金基昶 역시 미술의 대중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피력하고 있다. 그가 발표한<미술운동과 대중화 문제>551)김기창,<미술운동과 대중화 문제>(≪경향신문≫, 1946년 12월 5일).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리 미술의 전통과 유산인 고서화 및 고도기 등을 특정계급의 소유물에서 해방시켜 일반대중에게 열람시켜야 하며 미술학도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대중의 미적 생활 향상운동을 전개하는 데는 미술교재의 편찬과 미술잡지의 간행 및 대중 속에 침투할 수 있는 시대에 걸맞은 전람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것, 셋째는 미술이 대중에게 쉽게 접근될 수 있도록 미술작품의 생활화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朴崍賢은 미술의 대중화를 우리의 생활미를 회복하는 데서 찾아져야 할 것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절되었던 국가사회를 재건하는 동시에 특수한 우리의 생활미를 다시 찾아 옛날부터 흘러오던 생활형식과 풍속 중에 새로운 반성을 지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듯 해방공간에서 미술의 대중화, 미술의 생활화가 심도있게 논의된 것은 새나라 건설, 신민족미술 건설이라는 과제와 맞물려 일반 대중의 미술에의 계몽이 전제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절실성의 반영이라고 본다. 미술을 상아탑 속에 가두어 두어서는 미술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는 대중화·생활화는 그만큼 멀어져갈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의 생활화와 동시에 절실하게 구현되었던 것은 현실의 역사성에 입각한 비판적 감각으로서의 새로운 리얼리즘의 주창이었다. 리얼리즘은 단순한 이념으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가들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정신의 수용으로서 현실주의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다.

 李快大가 독도사건(미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어선이 공격당한 사건)을 테마로 그린 조난을 두고 한 朴古石의 비평은 당시 현실주의에 대한 미술가 일반의 인식을 대변해주고 있어 흥미를 끈다.

독도사건의 약소민족의 비애를 민족적인 충동에서 관심한 조난은 이 작가의 시대적인 감수성을 이야기하지만 관념적인 감동에 그치어 버리어 안일한 과거의 수법을 답습하였을 뿐 새로운 아무런 추궁도 없는 것은 평범하다. 바꾸어 말하면 의욕적인 구성과 인물의 아름다운 포즈는 크게 살 수 있으나 애매한 인물이라든가 바위에나 피부의 물질감의 등한한 취급은 치명상이다(박고석,<미술문화전을 보고>,≪경향신문≫, 1948년 11월 24일).

 리얼리즘에 투철한 작가의 작품에서도 현실에의 감동보다 관념적인 감동이 앞선다고 지적한 대목은 당시 전반적으로 비판적 현실감각의 빈곤을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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