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3) 음악
  • (2) 제1기 음악

(2) 제1기 음악

 일본이 떨리는 목소리로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국 산하의 어느 곳이든 눈부신 아침으로 빛났다. 훼손된 민족정서와 친일음악 행위를 청산하여 민족음악을 정립하고 새롭게 창출하는 길이 음악계의 역사적 과제였다.

 해방 당시 40대의 安基永(성악)·朴泰俊(작곡)·채동선(바이올린)·현제명(테너)·李鍾泰(음악교육)·金載勳(바이올린)·朴慶浩(피아노)·金世炯(피아노)·桂貞植(바이올린), 30대의 任東爀(작곡)·李愛內(피아노)·金元福(피아노)·李興烈(피아노)·朴泰鉉(첼로)·金聖泰(작곡)·崔昌殷(바리톤)·朴榮根(평론)·鄭鍾吉(바리톤)·李範俊(평론)·愼幕(베이스) 등이 악단의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또, 일본에서 학습한 제2세대의 朴容九(평론)·金順男(작곡)·李建雨(작곡)·朴殷用 등이 20대 후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학습한 30대 전후 세대는 이미 1940년 전후로 귀국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해방 당시 악단 구성원의 역사인식이나 음악에 대한 해석·경험은 일제강점하의 국내외 상황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어 있었다. 20세기 초반에 음악활동을 한 김인식·이상준 등은 일제강점하에 원로음악인들이 되었고, 1930년대 이후에 활동한 현제명 등은 일제와 손을 잡고 악단을 주도하였으며, 1940년대 벽두에 악단에 합류한 김순남·박은용·박용구 등은 신진들이었다.

 한편, 해방 당시 전통음악계는 60대로 丁元燮(북·장고)·咸和鎭(이론), 50대로 安基玉(가야금)·鄭應珉(판소리)·吳太石(판소리), 40대로 朴東實(판소리)·韓周煥(대금)·林芳蔚(판소리)·崔玉山(가야금)·朴綠珠(판소리), 30대로 朴憲鳳(교육)·金先得(피리·고수)·徐相云(대금)·姜章沅(판소리)·金千興(춤)·成慶麟·李炳星(가곡)·李珠煥(가곡)·趙相鮮(판소리)·申快童(거문고)·金炳昊(가야금)·金永胤(가야금)·金寶南(춤)·金允德(가야금)·李珠煥(가곡), 20대로 張師勛(이론)·孔基男(판소리)·金素姬(판소리)·林素香(판소리)·韓甲得(거문고)·朴貴姬(가야금 병창)·成錦鳶(가야금)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민족음악을 수립하기 위하여 1945년 8월 15일부터 동 연말의 제1기 기간 동안에 6개의 대표적인 음악단체를 결성하면서 흡수되거나 정비되어 갔다. 즉, 최초의 조직체인 조선음악건설본부(1945. 8. 18),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1945. 9. 15)과 고려교향악협회(1945. 9. 15. 산하에 고려교향악단), 국악원(1945. 10. 10), 10월 22일의 조선음악가협회, 그리고 조선음악가동맹(1945. 12. 13) 등이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16일에 합의된 최초의 음악조직체 조선음악건설본부는 조선문학건설본부·조선미술건설본부·조선영화건설본부 등과 함께 ‘문화전선의 통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8월 18일에 협의체로 결성될 때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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