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3) 음악
  • (3) 제2기의 음악 전개

(3) 제2기의 음악 전개

 제2기(1946. 1. 1∼1947. 8. 15)는 모스크바 3상회의(1945. 12. 27)에서 한국문제를 다룬 신탁통치안이 알려진 뒤 1946년 벽두부터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우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기간이다. 제1기 동안 조직을 정비한 악단은 제2기 벽두부터 이러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러한 민족현실은 제2기뿐 아니라 해방공간 전 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제2기 후기는 1947년 8월 15일 직전부터 미군정에 의하여 조선문화단체총연맹 뿐 아니라 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의 모든 정당·사회단체·음악단체가 비합법화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시기이다. 국악원·조선가극동맹·대중음악가협회는 자체 조직개편으로 난국에 대응하는 데 비하여, 조선음악가동맹은 분명한 자기 세계관 때문에 움직일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제2기의 전기는 1946년 벽두부터 1946년 8월 15일까지, 제2기의 후기는 1946년 8월 15일부터 1947년 8월 15일까지로 각각 구분할 수 있다. 제2기의 전기에 비하여 후기는 군정과 관계 당국의 금압이 강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단계의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전재민을 위한 종합예술제’·‘3·1절 기념 종합예술제’ 그리고 문화대중화운동을 정점화시킨 ‘문화공작대’ 등을 통해 조선음악가동맹의 강령이 실천되었다.581)≪예술통신≫, 1946년 12월 17·19·20·24·26·27일.

 우익은 존재론적 순수 미학관으로 서양음악을 해석하는 것에 비하여, 좌익은 사적 유물론과 그 미학관을 전통과 관련지어 해석하여 해방공간의 상황에 적용·대응하고 있었다. 동시에 후자가 도식화된 계급 미학론을 나름대로 자기 비판하면서, 민중·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음악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통’을 재해석한 결과였다. 이들의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음악할 것인가’라는 의문에서 실천적 덕목인 인식과 윤리 그리고 미적 표현성을 강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박용구의 비평에서 방향이 잡혀진다. 이 비평이 가능했던 것은 김순남·이건우에 의한 작품이 앞서 갔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조선음악가동맹의 출현으로 분명한 성격의 통일적 활동이 펼쳐지자, 우익적 성격의 연주가들이 대한연주가협회를 결성한(1946. 3) 데 이어, 8월에는 전 악단을 망라하는 전국음악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전국음악문화협회가 여전히 현제명 중심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또 다른 음악 협의체가 1947년 1월 10일 전국음악단체협의체로 발전·결성되었다. 그동안 조선음악가협회는 1947년의 ‘우리 작품 발표회’(6. 29∼30) 이후 전국음악문화협회나 전국음악단체협의체에 흡수·해체되었다.

 이 기간은 동시에 제1기와 달리 각종 음악단체가 장르별로 백화 난만하게 창립, 음악활동을 펼친 것도 한 특징이다. 제2기 전기 기간 동안 서울음악단·조선가극동맹·경성음악학교(교장에 현제명, 교무과장에 김성태, 이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로 편입됨)·한국오라토리오협회(박태준)·민족음악문화연구회(나운영)·서울관현악단·조선가극협의회·서울교향악협회 등과 국악분야도 국악원 산하의 국극협회(이후 국극협단으로 발전)·조선창극단·김연수창극단·시조연구회(李秉岐) 그리고 지방에서 경남음악협회·하동문화협회·경북예술가협회 등이 창립되었다.

 이 기간 주요 음악회는 1946년 2월의 조용자 무용발표회(11일)와 정인방 무용발표회(11일)·조선음악가협회 신춘문화대연주회(14일)·3월의 3·1절여학교연합음악회(1일)·3.1절기념야외음악회(조선음악가협회, 1일)·봉선화동요회 3·1기념의 밤(1일)·고려교향악단 제3회 정기공연(16일)·서북동포위안음악의 밤(18∼19일)·기미운동기념음악회(23일)·진수방무용발표회(23일)·고려교향악단 제4회 정기공연(30∼31일), 4월에 국악원의 국극사 창립피로대공연(춘향전, 1∼7일)·김창섭독창회(7일)·이화여자대학음악회(7일)·조선음악가협회 춘계음악회(8일)·한중친선음악회(9일)·고려교향악단 제5회공연(13∼14일)·전국농악대회 지방예선대회(20일)·춘계음악회(21일), 5월의 해방가요의 밤(4일)·전국농악대회(10일)·박은용독창회(11일)·경복중학교 음악연극회(11일)·오창진 독창회(19일)·서울여상 음악무용회(23일)·오페라협회 제1회 발표회(25일), 6월의 대학교향악연주회(2일)·해방가요의 밤(10일)·미군정청 문교부 기획과의 제1회 경성시내 남녀중등학교 음악회의 저녁(18∼19일)·이화고녀 합창회(24일)·경성음악학교 제1회 발표회(24일)·여자중학교전문학교 졸업기념음악회(27일)·하계음악강습회(24일), 음협의 우리작품발표음악회(29∼30일), 8월의 해방기념국악전(15일)·야외음악대회(17일) 등이 개최되었다.582)≪예술통신≫, 1947년 1월 1일.

 제2기 후기에는 시립취주악단·음악가의 집·전국취주악연맹·전국음악교육자협회·대중음악협회(김해송)·시온성합창단(李東日)·성종합창단(郭尙洙) 등과 지방의 金永泰성악연구회(대전) 등이 창립되었다. 이외에도 경성3중주단·올포이스4중주단·서울합창단·연악원 및 각 학교 음악부 등이 활동하였다. 주요 음악회는 9월의 가톨릭음악회(21일), 10월의 전국민속무용대회(4일)·국민학교연합음악회(7일)·옥인찬독창회(10일)·전국교육음악회(12일)·김혜경독창회(19일)·남조선음악콩쿨대회(20일)·어린이음악회(27일), 11월의 홍지유제금독주회(9일)·정인방무용발표회(10일)·전국취주악콩쿨대회(23일), 12월의 이경팔독창회(13일)·조선교회음악협회 제3회정기공연회(14일)·이두범독창회(15일)·음악동맹과 문학동맹의 음악과 시의 밤(16일)·미군정청 문교부 주최 전국제1회음악경연대회(20일)·자유신문사의 제1회 음악제(고려교향악단과 서울교향악단 출연, 21∼23일)·악극단 라미라의<공주와 산적>·<금강산이야기>공연(22일)·고려교향악단 제10회 연주회(29∼30일)·고려교향악단 미군위안연주회(29일) 등이 개최되었다.

 또한 1947년 1월에는 연악원과 경향신문사의 연악원 제1회 연구원발표(6∼7일)·조선문화단체총연맹(문련)의 제1회 종합예술제(8∼9일, 15∼19일)·이건우 작품발표회(12일)·박용구 가창지도회(21일)·고려교향악단 제11회 정기연주회(28∼29일)·명창대연주회(전주, 30∼31일), 2월의 서울관현악단 민중음악의 밤(1∼3일)·전국음악문화협회 국제친선음악회(14∼15일)·국악원 제1회 창극제전(춘향전 10∼12일, 흥부전 13∼17일), 3월에 음악동맹과 국악원의 3·1기념합동연주회(1일)·음악동맹 외 3.1기념음악무용대회(4∼9일)·고려교향악단 제13회 정기공연(25일), 4월에 테너 윤두선 도미송별음악회(5일)·홍지유바이올린독주회(22일)·고려교향악단 제14회 공연(26∼27일), 5월에 김상두 독창회(3일)·경주예술학원 창립1주년기념음악회(경주, 5일)·정훈모 제7회 독창회(7일)·전국중등학교 음악제(10일)·고려교향악단 제15회 정기공연(17∼18일)·국악원과 미군정청 문교부 예술과 공동주최 제2회 전국농악경연대회(23∼27일), 6월에 국악원 제2회 창악대전(대심청전, 7일)·전국취주악연맹 제2회 전국취주악대회(7∼8일)·신용대 독창회(20일)·계정식 바이올린독주회(25일)·정화영피아노독주회(28일), 고려교향악단 제16회 정기공연(29∼30일), 7월에 문화공작대 부산·대구·대전·경남·강원·충남·충북·경북 지방공연(5일∼8월 1일)·음악동맹 서울시지부의 근로자음악경연대회(예선 25∼28일, 본선 8월 5일) 등의 음악회가 개최되었다.583)≪예술통신≫, 1947년 1월 1일.

 한편 제2기 후기 기간에 채동선을 중심으로 고려음악협회(1947. 2)가 결성된다. 고려음악협회 회원 전체의 통일된 해석이 아니라 할지라도, 채동선은 좌파의 비조선적 내용을 비판하고 또한 극우 경향을 띤 순수음악 지상주의자들의 비순수성도 파헤치면서 ‘민족자결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양심과 강렬한 조국애를 표방하고 나섬으로써 새로운 해석 집단을 형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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