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3) 음악
  • (4) 제3기의 음악전개

(4) 제3기의 음악전개

 제3기는 미군정과 관계 당국이 좌익계열의 모든 단체들을 비합법적 단체로 규정한 1947년 8월 15일부터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 15일까지 일 년간의 기간이다. 이미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 3. 20∼5. 8)가 실패하자 미군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구상을 천명하고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은 이 안을 지지한다. 더욱이 미·소공위가 완전 결렬(1947. 10. 21)되어 미국이 제안한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안 등이 가결되고, 미군정 당국이<남조선 총선거법>을 공포(1948. 3. 18)하여, 분단의 고착화가 점차 현실화되었다. 반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김구 역시 김규식과 제휴하여,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한 북조선과 대화하기 위해 문화인 105인의 남북대화촉구성명에 힘입어 북행을 감행하였다. 이 성명(1948. 4. 14)에는 박용구·신막·안기영·박은용·이건우 등 5인이 참가하였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1946년 5월 7일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로 들어가고 소련측 대표단의 철수, 정판사 사건(1946. 5)에 의한 좌익계 인사의 피검,≪해방일보≫의 정간, 반탁진영의 정치공세 강화, 군정에 의한 좌우합작 추진 등으로 자신들에게 더욱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자 1946년 7월부터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의 9월총파업, 10월인민항쟁 이후 결성된 남로당은 민주주의민족전선과 함께 단정 반대투쟁을 전국적 규모로 전개하였다. 미군정과 관계 당국은 제3기부터 좌익운동을 완전 비합법화로 규정하여 조선문화단체총연맹 등의 인사를 검거·투옥하였다.595)1947년 8월 7일에 미군정청이 남로당 비합법화를 선언하고 그 관계자들을 대량으로 검거투옥한 데 이어, 같은 해 8월 11일에 민전·문련 인사를 대량 검거하자 국악원의 함화진 등이 피검되었다. 검거투옥된 수는 13,769명이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8월 18일 ‘남조선 적화계획과 군정파괴음모’를 전국에 걸쳐 분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좌·우익으로 분열된 음악단체들도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조선음악가동맹의 민족주의 음악운동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우익계의 음악단체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전면으로 부각된 음악단체로는 고려음악협회·서울관현악단(서울교향악단으로 발전)·고려교향악단·전국문화단체총연합·아악부·전국취주악연맹·조선오페라협회 등이었다. 이들이 주최하는 각종 행사 이외에 한국오라토리오협회 합창단의<메시아>공연(박태준 지휘, 서울관현악단, 1948. 1. 1)을 비롯한 각종 연주, 서울시 시공관 개관기념 연주회(1947. 12. 30), 조선오페라협회의<라 트라비아타>공연(이인선·김자경·馬金喜, 고려교향악단 출연, 1948. 1. 16∼20), 1948년 1월에 서울관현악단을 발전시켜 창립한 서울교향악단의 각종 연주회, 김순남가곡발표회(4. 23), 국악원 직속 국극사의 창립2주년 기념<선화공주>공연(4. 26), 국악연구회(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전신) 발족 겸 제1회 정례발표회(5. 3), 서울시 취주악단의 시민위안연주회(5. 8), 조선창극단의<왕자호동과 낙랑공주>(5. 11∼15), 서울시 주관의 음악제(5. 15∼17), 5인 음악회(소프라노 정훈모·테너 김창락·바이올린 박민종·피아노 김순열·이영희 등, 5. 27), 고려교향악단 제23회 정기공연(6. 12∼13), 서울교향악단 제4회 정기연주회(6. 23∼25), 조미합동 연주회(7. 9), 마금희 도미 고별독창회(7. 17),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제1회 졸업생연주회(7. 24), 서울교향악단 제5회 정기연주회(7. 25∼26), 대한민국정부수립축하음악회(8. 19) 등이 개최되었다.

 한편, 점차 입지가 좁아지던 민족좌파의 조선음악가동맹이나 국악원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체포령으로 김순남은 1947년부터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한편, 그해 9월 과도정부의 문교부가 개최한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 우익 음악인들이 김순남을 비롯한 조선음악가동맹측 인사의 심사위원 선정을 거부하였다. 국악원은 함화진 위원장이 1947년 8월 피검됨에 따라 박헌봉이 위원장으로, 채동선이 연구부장 등으로 개편되었다.

 이 시기에도 일련의 해방가요와 가곡이 압도적으로 유행했는데,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서를 떨치고 민족 정서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절박한 요청의 결과였다. 특히 ‘해방공간 제3기’에 음악사적 중요한 사건은 가곡창작과 가곡집 출판에 의한 가곡의 확산이었다. 김순남의≪산유화≫(1947, 5곡)와≪자장가≫(1948, 8곡), 이건우의≪금잔디≫(1948, 5곡)와≪산길≫(1948, 6곡)이 대표적인 가곡집이다. 이미 1946년에 임동혁의 가곡집≪시조 6수≫(6곡), 李齊九의 가곡집≪근화사≫(1948, 12곡) 등을 비롯하여 김성태의 가곡<오륙도>(1946), 김세형의 가곡<옥저>(1948), 尹伊桑의 가곡<나그네>와<달무리>등이 출판되었는데, 모두 민족전통을 회복한 새로운 한국가곡으로서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듯 이 시기의 가곡들은 민족음악 건설이라는 과제수행의 결과로서 새로운 민족음악적 특징들이 성숙해져 갔다. 동시에 이러한 특징은 가곡뿐만 아니라 기악작품에서도 확립되어 갔다. 김순남의<피아노 협주곡>(1946, 미완성)·<관현악과 성악을 위한 바라아데>수곡(1946),<제1교향곡 다장조>(1946)·교향시<태양없는 땅>(1947)·소관현악과 바리톤을 위한 연가곡<망명>(1947) 등과 이건우의<피아노 소품>수곡(1946)·<관현악을 위한 스케치>(1947) 등이 그 작품들이다. 작곡가 임동혁도 ‘민족음악의 수립’이라는 글을 게재한≪음악과 문화≫평론집을 1948년(동방문화사) 1월에 발행하였다.

 특히 성악작품에서 조성적 어법을 극복하고 현대적 기법과 민요를 비롯한 전통의 음악언어를 동시에 음악양식과 내용으로 체계화하거나,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해 前시대는 물론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의 작품과도 확연하게 구분되는 작품들이 나타났다. 김순남의<산유화>와<진달래 꽃>, 이건우의<금잔디>와<산길>들이 그것으로 그들의 음악은 전통 음악체계를 보다 더 공유하였기 때문에 민족음악을 지향하는 전문음악인들뿐 아니라 당대의 청중에게 널리 불려질 수 있었다.

 김순남의<산유화>에 대하여 박용구는 “국제적 수준에서 겨누어 볼 수 있는 가곡”이라고 평가하였다.596)박용구,<조선 가곡의 위치, 김순남 가곡집≪자장가≫를 중심으로>(≪신천지≫3-8, 서울신문사, 1948), 181∼185쪽. 이건우의 경우,<금잔디>에서 민요적 음계와 리듬에서 얻은 색채감을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으며,<산길>에서는 ‘하늘가에 가는 님의 목소리 혼자 귀에만 들려오네’와 같은 시 내용들을 전통음악의 4도 진행 선율이나 ‘떠어’나 ‘떠이어’와 같은 꾸밈음으로 적용시켜 그 詩情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김순남의<산유화>, 정종길의<농부가>, 이건우의<금잔디>3편은 무대에 올려지기 전에 눈뜬 민중들의 가슴에 파고들어, 다른 해방가요처럼 민족의 가요로 이 땅에서 널리 불려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597)박용구,<해방가요와 시>(≪음악과 현실≫, 민교사, 1949), 57∼61쪽. 이들의 작품들은 1946년 3월의 ‘이건우 가곡발표회’와 1948년 4월 23일의 ‘김순남 가곡발표회’ 등 공식무대를 통하여 전문음악인뿐 아니라 일반에게도 확산되고 있었다. 이후 성악가들의 독창회에서 이들 노래가 불려지는데, 1948년 7월 17일의 ‘마금희 도미 고별독창회’에서는 이건우의<금잔디>와 김순남의<진달래 꽃>이, 그리고 박은용의 ‘우리 가곡의 밤’(1948. 11. 12∼13)과 ‘李璟八독창회’(1948. 12. 15)에서도 이들 작품이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러기에 채동선이 이들을 일방적으로 ‘비조선적 유물론’ 계열로 비판한 것은 기실, 조선음악가동맹이 치열하게 민족 현실에 대응하는 태도의 형식을 이룬 이론을 비판한 것이지 삶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닌 것이 되며, 음악도 그 표현된 언어의 전투성 때문이지 작품 자체에 대한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채동선의 정치적 입장이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음악이었음은 옳게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민족음악이론에 있어 내용, 즉 우리가 조선인인 이상 우리 민족의 고유한 가사 및 애국시를 사용하는 성악곡은 물론이려니와 기악곡도 민족음악이 된다고 믿어, 안기영과 같은 3화음 체계로 추구한 것은 그 민족이론이 사고에 충실한 반영일 뿐이며 결코 음악 언어에 대한 반성된 성숙이 아니다. 3화음에 따른 기능화성 체계는 바로 서양민족의 언어이며, 바로 그 언어가 지난 1세기 동안 제3세계를 종속화시킨 합리화라는 힘의 언어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음악이론으로는 대응하여야 할 체계인 것이다.

 채동선의 가치는 민족자결 정신에 있었다. 그는 말한다.

요컨대 민족 자결이냐 다시 노예화냐, 민족적 양심과 강렬한 조국애가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 결정적 기본이념 없이는 단 음악뿐 아니라 모든 문화 건설을 논의할 아무 가치도 없다(채동선,<음악문화 건설에 대하여>,≪예술조선≫, 선문사, 1947, 21∼24쪽).

 채동선의 이러한 민족혼은 오히려 한민당과 미군정에 뿌리깊게 관계한 현제명 주도의 음악권을 비판한 것으로, 자주적 민족음악의 좌표를 설정하려고 열정적으로 불태운 혼의 드러냄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시대는 확실히 봉건과 독재를 떠나기” 위해서도 악단의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국립교향악단, 국립음악학교, 국립대합창단, 국립육군 취주악단, 국립음악출판사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민족음악 운운은 우선 예술로의 음악이 있는 뒷일일 것이다”라고 해방 직후부터 일관성 있게 주장한 김성태 계열과도 채동선은 분명 달랐다.598)김성태,<민족 음악의 기초>(≪경향신문≫, 1948년 1월 1일).

 제3기는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9월 9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민족음악을 건설하려 했던 희망이 반쪽으로 갈라져 깊은 좌절감에 빠지고 6. 25전쟁으로 지울 수 없는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체계를 종식한 해방의 그날들은 훼손된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민족음악을 수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모두에게 생명의 불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소에 의해 냉전체제가 고착되고 남북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됨으로 민족음악 건설 과제는 미확립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魯棟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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