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1. 대한민국의 수립
  • 1) 단정노선의 확정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
  • (1)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적 결렬과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1)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적 결렬과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전후의 한반도 문제에 대해 미·소가 합의한 바는 두 가지였다. 그 첫째는<일반명령 제1호>(1945년 8월 15일)에 담겨 있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 분할점령’ 방침이다.607)<일반명령 1호>는 그 형식에 있어서는 연합국간에 일본군 항복 접수지역의 분담을 규정한 것이지만, 사실상 전후 동아시아에서 미·소의 세력권 분할선을 그은 것이었다. 미·소는 이에 따라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북을 배타적으로 점령하였을 뿐 아니라, 점령지역 내에서 배타적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1945년 말에 이르면 남북에는 이미 상이한 두 체제가 그 기초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해결방안, 즉 단일의 독립된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으로 미·소가 합의한 것이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협정이었다. 그 내용은 ‘先 임시정부 수립, 後 신탁통치’를 거쳐 한국을 단일의 국민국가로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협정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각각 개최되었지만, ‘협의대상 선정문제’를 둘러싼 미·소의 이견으로 인해 결국 결렬되었다. 협의대상 선정문제란, 표면상으로는 임시정부 수립방안을 미·소공동위원회와 같이 협의할 한국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를 선정하는 문제였지만, 그 본질은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것이었다. 미국은 친미 우파주도하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했고, 소련은 친소 좌파세력이 주도하는 임시정부를 의도하였기에 양측의 합의는 처음부터 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합의를 더욱 어렵게 한 것은 우파측의 격렬한 反託運動이었다. 반탁을 근거로 소련은 협의대상에서 우파세력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배제하려는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1947년 8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적 결렬은, 분할점령으로 야기된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극복하고 단일의 독립자치정부를 수립할, 한반도 문제 해결의 유일한 미·소합의안인 모스크바협정의 최종적 파기를 의미하였다. 보다 중요하게 그것은 1947년부터 시작된 미·소냉전의 본격화와 미국의 대소정책의 전환 속에서, 한반도 문제 역시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됨을 의미하였다.

 1947년 초에 들어 미국의 對蘇戰略은, 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과 마샬플랜(Marshall Plan)으로 상징되듯이, 미·소협력에 기반한 루즈벨트(Roosevelt)式 국제주의 노선에서 미·소냉전에 기초한 봉쇄전략으로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전환되었다. 동아시아 차원에서도 미국은 중국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對蘇 봉쇄노선을 수립하게 된다.608)Cumings, Bruce G.,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II)(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M. Schaller, The American Occupation of Japan:The Origins of the Cold War in Asia(New York:Oxford University Press), p.72.
전후 미국 외교노선의 이러한 전환 속에서 미국의 對韓政策 역시 모스크바 협정안을 지키려는 상호주의 또는 대소 협조노선이 폐기되고 대신 소련과의 합의 여부에 상관없이 미국의 노선을 밀어 부치려는 일방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방침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한반도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1947년 2월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대한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결과 육군성과 국무성은 4월 초 새로운 대한정책에 합의하게 된다. 그 내용의 핵심은, 장차 개최될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진전이 없고 소련의 방해가 최종적으로 증명되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609)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7, Vol. VI, The Far East(Washington D.C.:U.S.GPO, 1972∼73), pp.610∼618.
신복룡 편,≪한국분단사 자료집≫Ⅳ(원주문화사, 1991), 424∼451쪽.
미국의 예상대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7월에 이르러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트루만 행정부는 8월 초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르면, 먼저 소련에 대해 한국문제를 다룰 4대국 특별회담 개최를 요구하고, 이 회담에서 남북한 각각의 점령지역에서 입법부 구성을 위한 유엔 감시하 선거(인구비례에 따라 선출)를 치를 것을 제안하며, 소련이 이러한 미국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양하여 남한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610)FRUS, 1947, Vol. VI, pp.738∼741.
차상철,≪해방전후 미국의 한반도정책≫(지식산업사, 1991), 155∼156쪽.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방침은, 소련의 반대가 명백히 예상되었기에 사실상 單政수립을 향한 방침이었으며, 또한 군부가 요구하는 조기 철군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유엔 이관 방침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가장 전통적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나타난 소련의 비타협적 태도에 맞서 한국의 독립과 통일 그리고 연합국들이 지지한 다국적 해결방안을 원했던 미국의 열망의 불가피한 결과”로 해석된다. 이와 반대의 견해는 유엔 이관을 미국의 책임회피 즉, 한반도로부터 명예롭게 퇴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석한다. 유엔의 개입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반도로부터 실질적으로 손을 떼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611)조순승,≪한국분단사≫(형성사, 1982), 142∼146쪽.
Goodrich, Leland M., Korea:A Study of U.S. Policy in the United Nations(New York:Council of Foreign Relations), pp.37∼41.
그레고리 헨더슨 저(박행웅·이종삼 역),≪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울, 2000), 233∼236쪽.

 그러나 유엔 이관 방침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숭고한 사명감의 발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포기도 아닌, 현실주의적인 타협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군부는 이미 1946년부터 한반도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이 크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에서의 조속한 철군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국무성은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로서 한반도가 가지는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조기 철군에 반대해 왔다.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방침은 이처럼 교착상태에 빠진 군부와 국무성간의 의견대립을 해소하는 방편이었다. 국무성은 군부가 요구하는 철군을 받아들였지만, 군부가 요구한 ‘남한 단정수립과 철군’이라는 일방적 조치를 거부하면서, 대신 유엔이라는 국제적 개입을 통해 한국에 ‘봉쇄’를 적용하고자 하였다. 미국은 소련의 협력 거부를 예상했지만 유엔이 미군 점령지역만의 선거를 후원하리라고 생각했고, 이를 통해 38선 이남에 수립될 단독정부는 유엔이라는 국제공동체로부터 도덕적·물리적 지원을 향유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형성된 정부에 대해 소련이 적극적인 적대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 점에서 유엔은 미국 군사력의 한계에 대한 대체물이었으며, 집단안보의 형태를 통해 값싸게 봉쇄를 추구하는 방법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봉쇄를 포기한 국제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의 옷으로 치장한 봉쇄였다.612)Cumings, Bruce G., op. cit, pp.65∼68.
제임스 I. 매트레이 저(구대열 역),≪한반도의 분단과 미국≫(을유문화사, 1989), 154∼155쪽.

 이러한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은 8월 말부터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시켰다. 먼저 1947년 8월 26일 국무차관 러베트(Robert A. Lovett)는 몰로토프(V. M. Molotov) 소련 외상에게 보낸 서신에서, 9월 8일 워싱턴에서 4개국 회의를 개최하여 새로운 한국문제 해결방안으로 “남북 각 점령지역에서 유엔 감시하 선거를 통한 남북인구비례에 따른 임시의회 구성 및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논의할 것을 제시했다. 소련이 9월 4일 몰로토프 서한을 통해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자, 미국은 9월 16일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소련 외상에게 미국정부는 한국문제를 차기 유엔총회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고 통고하였다. 다음 날 유엔주재 미국대표 오스틴(Warren R. Austin)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총회의 의제로 상정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고, 마샬(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 역시 총회석상에서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어떠한 합의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천명했다.613)FRUS, 1947, Vol. VI, pp.773·774·790.
차상철, 앞의 책, 166∼167쪽.

 이와 같이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함으로써 한국문제를 둘러싼 미·소대립의 무대는 유엔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유엔에서 미·소가 가장 먼저 부딪친 문제는, 유엔이 한국문제를 다룰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논란 끝에614)소련은, 총회가 국제평화와 안전보장 유지에 관한 모든 문제를 토의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문제는 이에 대한 국제조약(모스크바협정)이 이미 존재하고 또한 전쟁의 직접적 결과물이므로 유엔의 권한 밖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서 2차대전의 패전국에 대해 전승국이 취한 조치에 대해서는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이를 무효로 하거나 저지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유엔헌장 제107조를 제시했다. 소련의 비판에 대해 미국은, 헌장 1조 2항의 유엔의 기본목적을 내세우면서 이러한 기본조항에 맞추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은 적국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이 한국문제를 다루는 것은 헌장 107조 위반이 아니라는 입장을 제시했다. 사실상 한국문제는 일본군의 패전으로 대두된 것이므로 전승국들이 결정할 문제였으나, 헌장 제107조는 전승국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유엔의 정당한 기관이 조치를 취하는 것까지 금지하고 있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총회가 헌장의 취지에 의거하여 한국독립문제를 토의하는 것의 합법성 여부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고 해석된다.
조순승, 앞의 책, 143∼144쪽.
Goodrich, Leland M., op.cit., pp.36∼37.
결국 “한국의 독립문제를 유엔총회 안건으로 상정하자”는 미국의 제안이 9월 21일 운영위원회에서 가결되었고, 23일 유엔총회는 동 제안을 찬성 46표, 반대 6표(기권 7표)로 가결하여 한국문제를 제1분과위원회인 정치위원회에 회부하였다.

 한국문제가 유엔의 정식안건으로 채택되자, 미국측은 10월 17일 유엔에 제출한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통해 한국문제 해결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미·소 점령당국이 늦어도 1948년 3월 31일까지 각각의 점령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인구비례에 따른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전국적인 국회 및 정부를 수립하며, 새로 수립된 한국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미·소점령군은 조속하고도 완전한 철수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미국측 제안에 대해 소련은, 10월 28일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남북한의 대표를 초청할 것과 1948년 초까지 미국과 소련이 남북한에서 각기 그 군대를 동시 철수하여 한국인 자신에게 정부수립을 일임할 것을 제안했다.615)FRUS, 1947, Vol. VI, pp. 832∼835, 849∼850.
국제신문사 출판부 역,≪유엔조선위원단보고서≫(1949), 9∼11쪽.

 소련의 제안 중 한국민의 대표를 유엔의 토의에 참가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그 논리상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문제는 누가 한국민을 대표하느냐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민의 대표 참가를 촉진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유엔총회 제1분과위원회(정치위원회)는 10월 28일부터 한반도 문제를 토의한 결과, 10월 30일 소련측 결의안은 부결시키고, 미국측의 수정안을 찬성 41표, 반대 0표(기권 7표)로 채택했다. 이에 대해 소련대표 그로미코(A. Gromyko)는 만약 총회가 한국민의 대표를 토의에 참석시키지 않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한다면 소련은 위원단의 활동에 참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616)구드리치,<유엔에서의 한반도 문제 처리과정>(브루스 커밍스 외,≪분단전후의 현대사≫, 일월서각, 1983), 380쪽.
조순승, 앞의 책, 153∼155쪽.

 한국대표 초청문제가 해결되자, 소련측이 주장하는 ‘미·소양군 철수 및 조선인 스스로의 정부수립’ 방안617)이러한 내용의 대안은 이미 1947년 9월 26일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단이 제안한 바 있다.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소련의 제안에 대해 미국측은 정부수립에 대한 아무런 대책 없이 미·소 양군이 철수할 경우 그로 인한 혼란을 면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논전 속에 11월 4일 미국측은, 한국대표 초청문제에 관한 정치위원회의 결의 내용과 선거가 점령지구별로 각각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유엔 감시하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중국 및 인도의 동의 등을 반영한 새로운 수정안을 제출했다. 11월 5일 유엔정치위원회는 소련안을 부결시키고, 미국측 수정안을 찬성 46표, 반대 0표, 기권 7표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정치위원회가 상정한 결의안을 수정 없이 찬성 43표, 반대 0표, 기권 6표로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안을 통과시키고, 소련의 제안은 최종적으로 부결시켰다.618)정해구,≪남북한 분단정권 수립과정연구-1947. 5∼1948. 6≫(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5), 97·117·118쪽.
구드리치, 앞의 글, 380쪽.
FRUS, 1947, Vol. VI, pp.853∼854.
이렇게 하여 한반도 문제는 모스크바협정과 미·소공동위원회라는 기존의 해결구도에서 벗어나 유엔으로 그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한국문제 해결방안으로 채택된 11월 14일자 유엔총회 결의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선거에 의한 한국국민의 대표가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이러한 참여를 용이하게 하고 이 대표들이 군정당국에 의해 지명된 자가 아니라 한국국민에 의하여 정당하게 선거된 자라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조속히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을 설치하여 한국에 부임케 하고, 이 위원단에게 전 한국을 통하여 여행·감시·협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②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9개국 대표로 구성되며, 늦어도 1948년 3월 31일까지 보통·비밀선거원칙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남북인구비례에 따른 대표자들로 국회를 구성하고 중앙정부를 수립하며, 이 정부는 위원단과 협의하여 국방군을 조직하고, 남북의 점령당국으로부터 정부기능을 이양받으며,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양 점령군이 철퇴하도록 점령당국과 협정을 맺는다.

 (FRUS, 1947, Vol. VI, pp.857∼859;정일형 편,≪한국문제 유엔 결의문집≫, 국제연합한국협회 출판부, 1954, 2∼8쪽;국제신문사 출판부 역,≪유엔조선위원단 보고서≫, 1949, 18∼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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