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2) 정당들의 조직과 활동
  • (3) 북조선천도교청우당

(3) 북조선천도교청우당

 천도교계는 현실참여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1945년 8월 해방 이후 신국가건설과정에서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理想國家의 건설을 위하여 정치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천도교청우당은 그 정치활동을 담당한 천도교계의 정치조직으로서, 남북한에 각각 남조선천도교청우당·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조직, 운영되었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30여만 명에 이르는 당원을 기반으로 하여 북조선공산당의 ‘友黨’으로서, 북조선민전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북한의 정권수립과 제반의 사회개혁에 동참하였다.

 본래 ‘천도교청우당’은 1931년 2월에 천도교 신파의 천도교청년당과 구파의 천도교청년동맹이 합동하여 만들어진 천도교의 정치사회단체였으나, 신구파 분규가 재연되어 1933년 3월부터 다시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으로 복귀된 바 있다.735)만 2년에 걸친 천도교청우당의 활동은 최근 영인본으로 간행된 기관지≪黨聲≫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은둔 상태에 있던 천도교청우당 활동가들은 해방 직후 각 지역의 조직들을 복원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주둔군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지역에서는 1945년 10월까지 지방에서 당 조직들이 만들어졌다.736)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 문서군 0480, 목록 4, 문서함 14, 문서철 47, 99쪽. 한편 표영삼은 신의주 천도교청우당 시당 간부 최동조의 증언에 입각하여 북한지역에 천도교청우당이 부활한 것은 1945년 11월 초 신의주시당부 조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서술하였다(표영삼,<북한의 천도교(상)>,≪신인간≫375호, 1980년 3월, 23쪽). 이는 정식 지방조직이 건설된 시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1945년 10월 31일 지방 당조직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천도교청우당 부활전당대회에서 지방 당조직 재건을 결의하고 이에 따라 사전에 조직되고 있던 지방조직을 중앙 차원에서 승인하는 절차를 밟았을 것으로 보인다. 10월 31일에는 지방 당조직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도교 청우당 부활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서는 민족통일결성 촉진·전재동포 구제·실업대책·기관지 발행 등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당위원장과 중앙위원과 각 부서책임자를 선거한 후 폐회하였다. 위원장에 金起田, 부위원장에 李應辰이 선출되었다.737)≪자유신문≫, 1945년 11월 5일. 소련민정청의 기록에 의하면, 이 대회에서는 분단 조건을 고려하여 북한에 ‘당 서부지부’를 창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서부지부 중앙위원회는 김정주의 지도 아래 13명으로 구성되었다.738)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 문서군 0480, 목록 4, 문서함 14, 문서철 47, 99쪽.

 1946년 1월 25일 중앙위원회는 당지방조직대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당지방조직대표의 대다수는 북조선에 독립적인 청우당을 창설할 것을 요구하였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창당되었다.739)≪해방후 10년일지≫, 46쪽. 위원장은 金達鉉740)金達鉉은 1884년 함경남도 高原郡 출신으로 1903년에 천도교에 입도하였다. 그가 사회활동에 나서게 된 시점은 1919년 3·1운동 때부터이다. 3·1운동 당시 고원군에서는 천도교도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고원군 종리원장 趙東源의 지도하에 김달현 등이 참여하였다. 그후 1922년에 김달현은 無産者同志會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김달현은 1922년 12월 서울의 한 파업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또한 조선농민사 교양부장으로 활동하고, 1933년에는 천도교청년당 중앙위원, 1934년 1월에는 천도교 고원군 종리원장이 되었다. 그해 12월 제8회 천도교 임시대회에서 의장으로 당선되어 전국적인 인사가 되었다(표영삼,<天道敎의 3·1재현운동과 金達鉉>,≪북한≫220, 1990, 4월호, 122∼123쪽;김준엽·김창순,≪한국공산주의운동사≫2권, 고려대 출판부, 1969, 34쪽)., 부위원장 金廷柱·朴允吉이었다.741)백세명,<當時 北韓의 敎會實情>(≪南北分裂沮止鬪爭-3·1再顯運動誌≫, 천도교중앙총부출판사, 1969), 148쪽. 당검열위원장으로는 金明熺가 선출되었다.742)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 문서군 0480, 목록 4, 문서함 14, 문서철 47, 99쪽.

 천도교청우당은 창립대회 때 당원이 5만 2,959명이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1948년 9월 시점에는 당원수가 28만 9,494명으로 팽창하였다. 청우당원의 80%는 농민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그 외에 노동자가 7%, 사무원이 3%로서, 노동자-농민이 전체의 90%를 차지하며, 상인·기업가·수공업자·학생 등이 부분적으로 참여하였다.743)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 문서군 0480, 목록 4, 문서함 14, 문서철 47, 100쪽. 1948년 11월 시점에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6개 도위원회, 13개 시위원회, 83개 군위원회, 617개 면위원회를 포괄하는 정당으로 성장하였다(위의 글, 101쪽).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농촌에 거주하는 천도교인들로 주로 구성되었음이 확인된다. 조선민주당과 기독교계가 주로 도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면, 천도교는 반대로 농촌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천도교청우당의 국가건설 방략은≪黨志≫와<천도교정치이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黨志≫에서는 먼저 천도교의 원리를 종지·강령·목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宗旨는 ‘人乃天’, 강령은 ‘물심일원 성신쌍전 교정일치’, 목적은 ‘보국안민 포덕천하’이다. 그 다음 보다 구체적인 국가건설론을 당강령주해에서 설명하였다. 천도교청우당의 4대 강령은 아래와 같다.

1.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의 건설을 기함.

2. 事人如天의 정신에 맞는 새 윤리 수립을 기함.

3. 同歸一體의 신생활이념에 基한 신경제제도의 실현을 기함.

4. 國民皆勞制를 실시하여 日常輔國의 철저를 기함.

 (≪북한관계사료집≫8, 438∼445쪽).

 <천도교정치이념>은 기본 취지에서는≪당지≫와 논리 구성을 같이 하지만, 보다 균형적인 자세를 취하는 변화를 보여 미국식 자본독재와 소련식 무산자독재 모두를 비판하고 전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조선적 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그 균형은 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균형이었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소련식에 대해서는 계급독재가 필요하지 않은 한국적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방식을 취할 뿐이었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토지개혁에 동참하는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友黨’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청우당은 1948년 ‘3·1재현운동’ 사건으로 천도교인들 다수가 검거되면서 조선공산당측과 심각한 갈등에 빠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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