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초등학교 사회 6-1(6차)
  • 3.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
  • (2)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 독립 전쟁
  • [3] 청산리 대첩

[3] 청산리 대첩

중국과 연해주에서 일어난 독립 전쟁에 대하여 조사해 보고, 특히 그 곳이 우리 나라 독립군의 근거지가 된 까닭을 알아보자.

영수네 선생님께서는 독립군의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다.

“중국 동북부에는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특히 두만강 건너의 북간도 지방은 한때 우리 나라에 소속된 땅이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더욱 많았지요. 이 땅은 일본이 을사조약 후에 자기네 마음대로 중국에 넘겨 주고 말았어요. 간도 지방과 소련의 연해주에는, 우리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길 무렵부터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의병들과 일본의 억압을 피해 조국을 떠난 애국지사들, 또 살 곳을 찾아 조국을 떠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어요. 따라서, 그 곳 한국인 마을들은 자연히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어요.”

확대보기
독립 운동 근거지의 하나였던 용정
독립 운동 근거지의 하나였던 용정
팝업창 닫기

선생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민족 지도자들이 이 곳에서 자금을 모아 땅을 구입하고 군사 학교를 세운 후, 애국심에 불타는 우리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길러 내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다.

영수네 반 학생들은 선생님께 독립군이 싸운 이야기를 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셨다.

우리 독립군은 곳곳에서 일본군을 통쾌하게 무찔렀다. 그 중에서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특히 유명하다.

홍범도 장군은 을사조약 이후, 함경 북도 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크게 활약하던 분이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홍범도 장군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그는 자주 독립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와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군은 봉오동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이를 먼저 알아채고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 1개 대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확대보기
독립군 활동 지역
독립군 활동 지역
팝업창 닫기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크게 패한 일본군은, 더 많은 군대를 만주에 보내어, 그 곳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면서 그 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독립군을 돕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마구 학살하였다. 이 때, 독립군을 이끌던 사람은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일찍부터 학교를 세워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일을 하였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독립 운동을 하다가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는 만주 곳곳에 흩어진 여러 독립군 부대를 모아서 일본군의 총공격에 대비 하였다. 그러나 독립군 수는 3천 명 정도이고, 무기도 일본군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적은 수의 독립군으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처음에는 패하여 달아나는 체하며 일본군 2개 사단을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하였다.

확대보기
청산리 대첩(민족 기록화)
청산리 대첩(민족 기록화)
팝업창 닫기

독립군은 6일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포위하고, 험한 산길을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33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거나 부상시켜서 격퇴시켰다. 이것이 바로 독립 전쟁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청산리 대첩이다.

확대보기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한 독립군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한 독립군
팝업창 닫기

이 싸움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후에 안타깝게도 같은 동포인 공산당원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애야 한다면서,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또 무자비하게 사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이에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흩어져야만 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마침내 연해주 지역으로 그 터전을 옮기기도 하였다.

영수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싸우던 독립군들의 모습이 떠올라 자랑스럽고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