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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대한 독립 만세, 한국 광복군 만세
  • ● 3⋅1 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와 그에 맞선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보자.

● 3⋅1 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와 그에 맞선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보자.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은 해외에서의 무장 독립 운동과 국내에서의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의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독립 운동의 여러 모습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뜻을 어떻게 이어받아야 할지 토의해 보세요.

대표적인 무장 독립 운동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그 중에서도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가장 강력하였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홍범도 장군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였으며, 만주의 독립군 부대를 공격해 오던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거의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더 많은 군대를 만주에 보내어 그 곳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 독립군을 이끌던 사람이 김좌진 장군이었다. 1920년 10월에 김좌진 장군은 다른 독립군 부대와 힘을 합쳐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 대첩은 우리 민족이 독립 전쟁에서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와 청산리 대첩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한층 더 불어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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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민족 기록화)
청산리 대첩(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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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으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구나.

한인 애국단의 활동

한인 애국단은 1926년에 김구가 조직한 단체로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이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봉창 의사는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1931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입단하였다. 이듬해에 일본 도쿄에서 일본 국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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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와 한인 애국단 입단 선서문
이봉창 의사와 한인 애국단 입단 선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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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23세 때에 ‘대장부가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글을 써 놓고 집을 떠나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 후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에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일본 군대의 주요 인물들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 자리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젊은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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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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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를 통해 독립 운동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

연대 연도 사건
  1919 3⋅1 운동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
1920 1920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1921  
  1922  
  1923 물산 장려 운동
  1924  
1925 1925  
  1926 6⋅10 만세 운동
  1927 신간회 조직
  1928  
  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30 1930  
  1931 문맹 퇴치 운동
  1932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1933  
  1934  
1935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0 한국 광복군 창설
  1941 태평양 전쟁
  1942 조선어 학회 사건
  1943  
  1944  
1945 1945 8⋅15 광복
  1946  
  1947  
  1948  
  1949  
1950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

1927년, 신간회는 국내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조직되었다. 국가의 힘을 기르는 데에 목적을 둔 신간회는 일제와의 타협을 반대하였고, 우리말 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학생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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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창립(신문 기사)
신간회 창립(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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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지 정책 때문에 우리 민족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 가자 신문사를 중심으로 한글을 보급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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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퇴치 운동(신문 기사)
문맹 퇴치 운동(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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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산업을 발전시켜 경제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 벌어진 물산 장려 운동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세우며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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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품 애용 선전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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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학회는 한글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한글’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고, 우리말 큰사전을 펴내고자 준비하던 중에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광복 후 한글 학회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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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당한 사람들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당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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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내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면 일제에 어떠한 방법으로 항거하였을지 이야기해 보자.

일제는 1930년대 이후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1941년에는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제의 침략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많은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과 민족 문화를 지키려는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우리 나라를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기지로 만들어 나갔으며, 지하 자원과 식량을 약탈하였다.

침략 전쟁이 확대되자 일제는 우리 나라의 청⋅장년 남성들을 전쟁터나 광산, 공장으로 끌고 갔다. 또, 젊은 여성들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로 끌고 가 희생시켰다.

또, 일제는 패망을 앞두고서 우리의 민족 정신을 없애고자 우리말의 사용을 금 지하고, 우리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였으며, 곳곳에 신사를 세워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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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강제로 거두어들인 금속 제품들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강제로 거두어들인 금속 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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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노역에 동원된 사람들
강제 노역에 동원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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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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