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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Ⅲ장 삼국 시대 문화
  • 1. 삼국의 성립과 국제 관계

1. 삼국의 성립과 국제 관계

고구려

고구려는 만주와 조선에 걸쳐서 일어난 국가였으니, 처음에는 부여와 같이 원시적인 부족에서 갈라져 나와 차츰 인접(隣接)한 각 부족과 한족에 대하여 끊임없는 투쟁을 거듭하여 끝내 강력한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다. 위씨가 요동과 조선에 걸쳐 있더니, 한 무제의 침략으로 망한 뒤, 요동에 한 4군이 앉으매, 동방의 여러 부족은 급속하게 한족의 발달한 문화에 접촉하게 되었고, 또 강력한 한족의 국가와 접촉하여, 우리의 여러 부족 사회는 발전⋅통합에의 기운이 짙어졌다. 지리적으로, 앞에 한족 사회를 끼고 압록강과 동가강(佟佳江) 일대에서 발전한 고구려에는 그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 주몽(朱蒙)이 즉위함에서 사실상 세습적(世襲的) 지배권(支配權)이 확립되었다(37 B.C.). 이어 고구려의 힘찬 발전은 미천왕(美川王, 300~331 A.D.) 때에 이르러 요동 방면의 낙랑군을 무찌르면서(313 A.D.)부터 요하(遼河)를 넘어 한족의 강토(彊土)를 흔들고, 이어 유명한 호태왕(廣開土境永安好太王, 391~412) 때에는 또한 중국의 내란의 틈을 타서 요하를 넘어 뻗어 나가고 남으로 조선 반도 안으로 향하여 크게 공략(攻略)을 전개시키어, 백제(百濟)와 싸우며, 척강(拓疆, 국경을 늘인다)의 사업을 차근히 전개하였으며, 장수왕(長壽王, 413~491) 때에는 나라의 위력을 가장 떨치게 되었다. 또 북으로 부여의 옛터 동부 말갈(靺鞨)에, 연접하고, 동으로 동해(東海⋅日本海)에 이르고, 남은 한강을 넘어 백제와 맞서서 항쟁하였다. 서쪽으로는 개원(開原)⋅봉천(奉天)을 지나 요하를 건너 요서(遼西) 지방에까지 미쳤으며, 이에 끊임없는 전쟁을 거듭하며, 서력 제5세기 이후에는 해동(海東⋅우리나라)의 가장 강한 나라로 제6세기 끝까지 이 판도(版圖)를 지니었었다.

백제

건국된 전설을 보면, 시조 온조(溫祚)는 북방 부여계(夫餘系)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말한의 여러 부족 중에서 백제국(百濟國)을 중심으로 말한의 각 부족을 정복 통합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18 B.C.). 때에 따라 그 강역이 늘고 줄기도 하였으나, 근초고왕(近肖古王, 345~374) 때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들이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패사(敗死)하게 하였지만, 고구려가 강력하게 발전하던 호태왕⋅장수왕 때에는 국도(國都)를 웅진(熊津, 忠南 公州)으로 옮기며, 신라(新羅)가 강성하여지자, 다시 사자(泗泚, 忠南 扶餘)로 천도하여 차츰 후퇴하게 되었으나, 한때는 북으로 패하(浿河, 黃海道 猪灘?)에 이르고, 서남은 황해를 끼고, 동남은 신라의 서북 여러 고을(各郡)을 빼앗아 합치며, 가야(伽倻)의 진주(晋州)까지 차지하였으나, 대체로 지리산(智異山)이 신라와의 경계가 되고, 북에서는 한강 유역이 고구려와의 경계선(線)이 되었었다. 사회의 발전은 북쪽의 고구려와 같이 농업 생산을 위주로 한 정복적인 국가이었다. 이에 그들은 자기의 영역(領域, 영토) 안에 끼친 한족 문화의 유산을 흡수하며, 자체의 발전에 따라 해외로 진출하여 대륙 중국 문화를 수입함에서, 백제 문화의 발전을 보이어 삼국이 정립(鼎立) 할 때는 북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결전을 거듭하며, 남으로 신라의 발흥에 대비(對備)하여, 전쟁에 겨를이 없었다. 이런 어려운 중에서도 섬려한 문화를 지니며, 더욱 나아가 서일본(西日本) 일대에 옮기어 살게 될 때, 자기들의 문화를 이식(移植)하여 고대 일본 사회에 끼친 것이 많아, 일본의 발전을 촉진시키었다.

신라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의 건국(57 B.C.)이 삼국 중 가장 먼저된 것으로 적혔으나, 사실은 통합이 제일 뒤늦었던 사회로, 진한(辰韓) 12국 중 사로국(斯盧國)에서 발전하였으며, 원시 부족 공동체(共同體)인 육촌(六村)의 평의회(評議會)에서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수장(首長)으로 선출되었으나, 이것은 아직 모계(母系) 씨족제의 둘레 속에 있던 것이다. 대개 제4세기 중엽에 와서 통일 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삼국이 정립할 때는 낙동강 유역의 제 부족을 통합하여, 크고 작은 여러 벌(平野)을 흡수하며, 서남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휩쓸고, 남해의 해상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의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기도 하여, 서쪽으로 뻗어 미추홀(彌鄒忽 仁川 부근)⋅남양만(南陽灣)의 어구를 손에 잡고, 황해로 진출하여 중국의 여러 왕조와 연락하며, 반도의 허리통을 차지하게 되는 강한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북경(境)의 고구려⋅백제와는 쉴사이 없이 침입하여 땅을 차지하며, 또는 침입을 당하여 빼앗기기도 하였으나, 그때의 우리 나라를 중심한 대륙국가와의 국제 관계를 잘 이해한 신라는 안으로 끊임없이 자주(自主) 발전하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대체로 내물왕(奈勿王)에서 지증왕(智證王)에 이르는 한 160년(356~514) 사이에는 곧 자립할 준비에 힘쓰며, 이어 법흥왕(法興王)에서 진덕왕(眞德王) 때까지의 약 140년(514~654) 동안에는 반도 안에서의 정복(征服)을 추진시켜 자유로운 활동을 하게 되었다. 유명한 진흥왕(眞興王, 540~576)의 순수비(巡狩碑)를 보면, ① 마운령비(磨雲嶺碑, 咸南 利原郡 萬德山) ② 황초령비(黃草嶺碑, 咸南 咸興郡) ③ 북한산비(北漢山碑, 京畿道 高陽郡 北漢山 碑峰) ④ 창녕비(昌寧碑, 慶南 昌寧郡 邑內面 末屹里) 등으로, 그들이 사면으로 척강에 바빴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복 사업은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는 준비로, 불교의 전파와 화랑의 활동, 육부(六部) 체제의 개조에 따른 내부 사회의 발전과 함께 태종 무렬왕(太宗武烈王)에서 문무왕(文武王)의 2대(654~681)에 걸쳐 반도를 단일 사회로 통일하는 시기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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