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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국의 예술

고구려

현실 생활과 내세의 세계를 그린 고분 벽화는 곧 고구려의 회화(繪畵)로 특히 풍속도(風俗圖)와 아울러 또 죽은 사람을 현세의 집 속에 있게 하는 뜻으로, 벽화에 그대로 집을 그린다든지, 분묘 속을 건축하는 집처럼 장식문(裝飾文)으로 꾸미는 것은 특색있는 것으로, 동아지대에 보기 드문 특색있는 훌륭한 기법(技法)이요, 이채(異彩)라고 하겠다. 고구려 의약의 진전에 따라 약물성(藥物性) 색소(色素)를 분별하여, 분묘 벽화는 곱게 다채(多彩)로웁게 되었었다. 또 일본에 간 담징(曇徵)은 그곳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지(Horuji, 法隆寺)의 금당(金堂) 벽화 제작에 힘써, 오늘날 그 자유로운 선(線)으로 그린 보드랍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게 한다. 건축은 사회 경제 생활의 발달과 종교 사상이 깊어짐에 따라 궁실(宮室)과 성곽(城廓), 일반 주택에서 분묘의 곽(槨), 또 불교의 홍포(弘布)에 따른 사원의 건축으로 발전하였다. 통구 지방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턱에 있는 장군묘(將軍墓)의 규모를 보면 높이 전 40척, 첫층 한쪽의 넓이만이 거의 100척으로, 외곽(外廓)은 화강암의 대재(大材)로 8층의 방단(方壇)을 이루고,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차차 줄어들어, 머리는 석회콩크리트로 원형(圓形) 천개(天蓋)를 이루고 있다. 그 돌을 깎은 기술은 정교(精巧)함이 극도에 달하였고, 웅장하고 교묘하면서 또 수학적인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평양 부근의 청암리(淸岩里)에 남은 건축 군지(群址)를 보면 빈틈없는 수리적인 계획에서 이루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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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호류지’ 벽화 ‘관세음보살 상’
일본 ‘호류지’ 벽화 ‘관세음보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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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묘 구조도(將軍墓構造圖)
장군묘 구조도(將軍墓構造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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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들어와 전파되어 사원이 건축되며, 또 불상(佛像)을 만들었다. 터만 남은 절터로는 평양 청암리와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덕산면(德山面) 원오리(元五里)의 절터는 발굴되어 그 때의 건축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이불(泥佛; 흙으로 만든 불상)과 기와가 발견되어, 기와 머리(鐙瓦)의 연화(蓮華)⋅인동(忍冬)⋅엽상(葉狀)⋅곡선(曲線)⋅수면(獸面) 등의 무늬는 간소(簡素)하고 청초(淸楚)한 모습과 섬려(纖麗)한 솜씨를 보인다.

원시적인 사회에서부터 노래를 부르며 춤추고 놀았으니, 그것이 발달하매, 고구려의 가무가 고려기(高麗技)라 하여 수(隋)에도 전하였고, 악기는 쟁(箏)⋅공후(箜篌)⋅피리(篥篳)⋅생(笙)⋅요고(腰鼓) 등 열 네가지를 일부(一部)로, 악공(樂工) 18인이 종사하였다. 남아있는 가요로는 유리왕(琉璃王)이 죽은 치희(雉姬)라는 한 나라 여자를 생각하여 부른 황조가(黃鳥歌)만이 한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번역〉

翩翩黃鳥    꾀꼬리 오락가락

雌雄相依    짝지어 서로 놀건만

念我之獨    내홀로 외로워라

誰其與歸    뉘와 함께 돌아가리.

(三國史記 卷 13 琉璃王 3年條)

또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고구려의 노래라고 하여, 내원성가(來遠城歌)와 연양가(延陽歌) 등 몇 가지가 이름만이 전한다.

백제

건축은 지금 남아 있는 현저한 것으로는 부여(扶餘) 절터의 부여탑(俗稱 平濟塔)과 익산(益山) 미륵사(彌勒寺)의 석탑을 비롯하여, 사원 건축⋅정원(庭園) 공사 등으로, 현재 사원 유지(遺址)도 전부 수학적인 비례(比例)를 기초로 한 과학적인 기술과 경험을 잘 활용하였었다. 더욱 백제의 건축 기술은 통일 전의 신라 건축 기술의 선구이었다. 경주 황룡사(皇龍寺) 구층탑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가 지도하여 이루었고, 분묘 구축도 신라는 백제 것을 본받았다.

불교 전파에 따라, 사원의 건립(建立)⋅조탑(造塔)⋅조불(造佛)이 성왕해졌다. 특히 부여탑(扶餘塔)은 화강암으로 된 오층 34척이며, 탑신(塔身)⋅옥개(屋蓋)의 선(線)이나 전체의 느낌이 꼭 목조와 같이 고웁고 보드라우며, 그 경쾌함은 백제 석조 미술의 정수이다. 7층인지 9층인지 추측할 뿐인 미륵사 석탑이 용화산(龍華山)을 등지고 우뚝 섰는 품은 장엄하며, 불상 제작에는 규모가 큰 장륙불(丈六佛)보다 금동 소상(小像)이 고졸(古拙)히 아름답고 어여쁘게 발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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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탑(扶餘塔)
부여탑(扶餘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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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군 삼기면(三箕面) 석불리(石佛里)의 석조 여래상(如來像)은 규모의 큰 것으로 그 때의 수법을 보여주며, 백제에 납석(蠟石) 불상이 흔함은, 석재(石材)의 유연성(柔軟性)을 이용하여 섬세한 조각을 하려던 것으로 백제 조각의 특이성의 하나이다. 기와와 벽돌장(塼)은 견치(堅緻)하게 만들며, 평와(平瓦) 한 면에 각자(刻字)를 하였으며, 방형전(方形塼)에 와운문(渦雲文)⋅봉황문(鳳皇文)⋅귀형문(鬼形文) 등 여러 가지 문양을 경쾌하게 배합(配合)한 것도 백제의 독특한 기품을 지닌 것이다. 장례에 쓰던 거대한 옹관(甕棺) 등의 제조는 또 그들의 웅건성을 표시한다.

분묘 구축(構築)에는 돌을 깎아 네 벽을 세우고, 위에 돌장을 덮어 아궁이 같이 만든 것(京畿, 廣州郡 中垈面 石村里 積石墓)에서 전실분(塼室墳)으로 또는 석실분(石室墳)으로 발전되었다. 더욱 부여의 능산리(陵山里) 석실분의 현실(玄室)은 화강석(花崗石)으로 구축하며, 벽을 곱게 갈고(水磨), 그 면(面)에 사신상과 연화⋅비운(飛雲) 무늬를 섬세히 그리었다. 또 익산군 팔봉면(八峯面)의 쌍릉(雙陵) 중 큰 석실에는 목관(木棺)이 남아 있었고, 관 네 귀에는 금박(金箔)을 놓고, 금⋅동 장식의 병(鋲, 머리 큰 못)을 친 것은 당시의 아름다운 형식을 보이며, 송산리⋅능산리 분묘에서 나온 구옥(勾玉)⋅환옥(丸玉)⋅금 귀걸이와 대금구(帶金具) 등은 아울러 호사스러운 백제 문화의 모습을 전한다.

문학은 한학과 불교의 저술도 거의 오늘에 전함이 없고, 노래는 고려사 악지에 제명(題名)이 전할 뿐이요, 오직 정읍사(井邑詞)란 노래만이 간신히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한다.

음악은 공후⋅쟁(箏)⋅피리를 썼고,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놀음(遊戱)이 있었다.

신라

통일 시대 신라 예술의 지반을 이루는 것으로 대체로 고졸(古拙)한 데서 차츰 사회의 통일 안정에 따라 완성 체계를 지니는 아름다움에로 발전한다.

신라 문화의 발상지요, 그 요람(搖籃)이었던 경주는 조선 고대 문화의 고향이었다. 지금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는 이 일대를 둘러싼 산은 남산(南山, 金鰲山)을 빼고는 모두 수목으로 덮이어, 푸른 언덕 같이 고도의 경사를 이룬다. 이 산간에는 하천이 통하였으니, 그 주류로 서산 밑을 따라 북으로 흐르는 서천(西川)은 형산강(兄山江)을 이루어 멀리 80리를 구비쳐 영일만(迎日灣)으로 흘러간다. 서천에는 북쪽을 달리는 북천(北川, 閼川)과 남쪽을 흐르는 남천(南川, 蚊川)이 합류한다. 이 일대는 고래로 땅이 기름지어 오곡이 잘 익었으며, 하천 유역은 교통이 발달하며, 맥맥히 연달은 주위의 산들은 자연의 요새(要塞)를 이루고 있다. 문천(蚊川) 북쪽 강안에 남아 있는 언덕이 곧 반월성(半月城) 옛터로 면적만도 12정보이며, 토성(土城)의 높이 예닐곱 간이나 된다. 파사(婆娑) 이사금 22년(101)에 월성을 쌓고 옮기어 살았으며, 또 경주 벌판 곳곳에는 왕궁⋅가구(街衢)⋅조방(條坊)의 옛터가 초석(礎石)만 남아 있으나, 전에는 다 계획적으로 할지(割地)를 하였던 것이다. 대체 통일 전의 예술품은 경주를 중심한 일대에 남아 있다. 남산 석벽을 깎고 새긴 석불(石佛)은 고졸한 풍의 작품으로, 신라 사람의 자연을 동경하는 아름다운 심성(心性)과 종교적 엄숙과 바야흐로 발전하는 국가의 기백 그대로의 웅혼(雄渾)함을 조화있게 나타내었다. 경주 시중에 있는 흥륜사(興輪寺)⋅황룡사(黃龍寺)⋅분황사(芬皇寺)는 북위(北魏)의 영녕사(永寧寺)의 일탑식(一塔式, 塔⋅金堂⋅講堂을 北에서 南向하여 一直線으로 配置하는 樣式)을 따랐으나,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으로 가람(伽藍)을 배치하여 중국제도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또 고구려의 사원(청암리 절 터)과도 같다. 황룡사의 장륙불(丈六佛)은 진흥왕 때(574)의 제작이요, 선덕왕(善德王) 때(634)의 분황사 석탑과 10년 뒤에 황룡사의 구층 석탑은 신라 사람의 지휘감독 아래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제작하였고, 또 선덕왕 때의 첨성대(瞻星臺)는 지금 남아 있는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天文臺)일 뿐 아니라, 축조(築造)에 있어 돌 하나도 헛되이 쌓은 것이 아니라, 다 천체 운행(運行)에 맞춰 수학적으로 계획하였던 것이다. 통일기의 신라 불교 미술의 정화(精華)라고 하는 불국사(佛國寺)도 앞서 법흥왕 때에 창건(創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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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瞻星臺)
첨성대(瞻星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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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佛國寺) 자하문(紫霞門)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함영루(涵影樓)⋅P⋅66 얼러보라
불국사(佛國寺) 자하문(紫霞門)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함영루(涵影樓)⋅P⋅66 얼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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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고분 속에 남아 있는 신라의 공예 미술도 통일 전의 고졸미를 엿보게 된다.

경주읍(慶州邑) 노서리(路西里)에는 금관총(金冠塚)⋅서봉총(瑞鳳塚)⋅봉황대(鳳皇臺) 등의 분묘가 있고, 황남리(皇南里)⋅황오리(皇吾里) 일대에도 옛 꿈을 담은 크고 작은 많은 고분이 산재한다. 특히 봉황대는 밑바닥의 직경(直徑) 약 270척, 높이 70척의 자연으로 된 언덕 같다. 경주 고분은 적석목곽식(積石木槨式) 구조로, 이와 비슷한 묘제(墓制)는 몽골 노인⋅우라(Noin-ula)산을 비롯하여 동부 알타이(Altai) 지방에도 있다. 신라에서는 원래의 지석묘(支石墓)와 북방의 목곽분(木槨墳)의 영향을 받아 조화된 것 같다. 이와 병행하여 횡혈식(橫穴式) 석실(石室)로 된 것이 있고, 이것은 후대에까지 전하여진 묘제로 적석목곽분 보다 발달된 것이었다. 이런 고분의 부장품은 대부분 금은품과 유리구슬, 즉 비취(翡翠), 구옥(勾玉) 등으로, 금관총⋅금령총⋅서봉총 등에서 금관(金冠)이 나옴에 금관총의 금관은 130엽(葉)의 작은 보요(步搖)와 작은 구옥(勾玉)의 비취 57과(顆)를 달아, 찬연한 황금의 빛남이며, 칠락막락한 미동(微動)에도 흔들리어 빛이 떨리는 보요와 그에 점철된 아름다운 푸른 구슬의 조화는 금관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신라 금제품 발달의 최고이다. 또 반지⋅팔찌⋅귀걸이⋅띠⋅패물(佩物) 등 금 세공의 발달은, 고래로 금⋅은 산출로 이름있던 삼한 땅의 한 고장에 살던 신라 사람으로는, 그것을 이용하여 화려함을 즐기던 그들의 성격에 맞추어서 발달시키어, 동아에 있어 특이한 문물을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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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 보관(純金寶冠)
순금 보관(純金寶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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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에 있어 가요(歌謠)는 전부터 전송(傳誦)되었으며, 특히 신라 사람들이 노래를 좋아하였다 한다. 일찌기 부녀자들이 중추(仲秋) 15일에 모여 놀이할 때 부르던 회소곡(會蘇曲, 아소곡)은 슬픈 음조를 뒷 사람의 마음에 깊게 간직케 하였고, 왜국(倭國, 日本)에 사행(使行)하여 그 곳에서 죽은 박제상(朴堤上)을 생각하여 치술령(鵄述嶺)에서 통곡하고 세상을 떠난 제상의 아내를 애처로이 여기어 부른 치술령곡(曲)이나, 고구려의 국경에 있는 장한성(長漢城)을 다시 찾으매 그 공을 노래한 장한성곡은 곡명(曲名)과 그에 대한 얘기만이 전할 뿐이다.

가야

또 가야는 백제나 신라와 같은 문화를 지닌 같은 민족이었다. 그들의 문화적 유물로는 그 옛터인 고령⋅성주⋅창녕⋅함안에 남아 있는 분묘에서 찾을 뿐이다. 또 김해⋅영산(靈山)⋅함창(咸昌)⋅진주(晋州)에도 가야의 고분이 산재한다. 여기서 출토된 것이 가야의 예술 문화를 제시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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