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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발해의 변천과 문화

5. 발해의 변천과 문화

고구려가 망한 후 30년 만에 고구려 유민(遺民) 중의 대조영(大祚榮)은 요동에서 동북 만주로 옮기어 들어가서, 송화강(松花江) 상류 지방 화전(樺田, 中京)에 국도를 두고, 나라를 세워 진국(震國, 東國의 뜻)이라 하였다. 후 제8세기 초엽에 국호를 발해(渤海)라 하고 말갈족(靺鞨族)과 계단족(契丹族) 등을 복속시키고, 당의 개원(開元) 연간에서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에 이르는 사이 해동(海東)의 성국(盛國)으로 당의 오도(五都)를 본받아 상경(上京, 寧古塔 부근)⋅중경(中京, 敦化 부근)⋅동경(東京, 琿春)⋅서경(西京, 臨江)⋅남경(南京, 咸北 鏡城?) 등 오경(五京)을 두었다.

그들은 한때 당나라에 쳐들어 가려다가 성공치는 못하였으나, 당과 일본과의 왕래가 빈번하여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어, 고구려 문화의 웅건성을 지닌 그들로는, 그 때 남쪽에서 찬란한 문화를 지니고 발전하던 신라 사람들의 섬세(纖細)함을 못 따라도, 강건(剛健)성을 지닌 것이 그들의 공예의 특성이었다.

지금 공예품으로는 동경성(東京城)에 남아 있는 남대묘(南大廟)의 석등(石燈)은 높이 7m나 되는 웅장한 것이요, 상경과 동경 등지에서는 벽돌(塼)과 기와 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기와는 녹유(綠釉)를 칠한 것이 있고, 또 연화문(蓮華文) 등이 있으며, 또 아직 알려지지 않은 글자가 새겨진 것도 있으니, 이는 아마 그들의 고유한 글자를 지니었던 것인가 한다. 도시 제도 역시 당의 장안(長安)의 제도를 따라, 중앙에 주작대로(朱雀大路)를 두고, 좌우경(左右京)으로 나눈 것, 또 종교⋅음악 등도 당에서 수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교통에서는 일본과 당의 연락 지점으로 일본 사신이 발해를 거쳐 당으로 왕래하였다. 그리하여 발해에는 국 내외로 교통로와 역제(驛制)가 발달하였다. ① 신라도(新羅道, 南海=北靑?→咸興→新羅 泉井郡), ② 조공도(朝貢道, 中京→南京=通溝→旅順→山東半島→長安), ③ 영주도(營州道, 長嶺府→奉天→遼陽→營州), ④ 계단도(契丹道, 扶餘府→公主嶺→鄭家屯→契丹) 등의 중요한 교통로는 고구려 고지(故地)에 고구려 사람이 세운 발해의 융성하였음을 내세울 수 있는 바다. 그들은 애왕(哀王) 때(926)에 북에서 내리 미는 계단의 힘에 못이겨 200여 년의 사직을 끝막았다. 그들의 문화와 함께 그 역사 전체가 이제까지 우리 나라 역사에서 빠져 나갔으니, 발해사(史)의 기록은 오직 중국의 양(兩) 당서(唐書)에만 전한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문화는 남방 신라 문화와 맞섰고, 발해가 망한 후 그 땅에는 아직 우리 민족의 국가적 세력이 그에 미치지 못하고, 그 곳에는 다른 민족과 나라가 일어남에, 모두 중원에 동화됨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의 주류에서 벗어났으니, 다시 회고하여 새로이 인식할 우리 민족의 고문화의 일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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