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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Ⅶ장 조선 문화 중기(1593~1863)
  • 5. 조선 부흥기의 예술

5. 조선 부흥기의 예술

경제적으로는 구 체제를 뭉그러뜨리며, 새로 분화(分化)되어 왔으나, 우선 파괴된 사회가 정돈됨에 따라 문화면에는 새로이 전개됨을 보게 되었으며, 더욱 숙영(肅英)⋅정순(正純)에 걸쳐 조선 고전 문화의 마지막의 꽃이 피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에 있어 영⋅정⋅순(英⋅正⋅純) 3대(代)에 걸친 학예 부흥의 소산이었다.

시문에 있어 윤근수(尹根壽, 號 月谿)⋅장유(張維, 號 谿谷)⋅이식(李植, 號 澤堂)⋅김상헌(金尙憲, 號 淸陰) 등은 최립(崔岦, 號 簡易)의 글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 그 때의 문장들이었고, 허목(許穆, 號 眉叟)⋅신유한(申維翰, 號 靑泉) 등은 더욱 걸출한 사람들이요, 특히 인조 이후에는 명의 시문집이 번각(翻刻)까지 되어 영향을 많이 끼치었고, 더욱이 전겸익(錢謙益, 號 牧齋)의 유학집(有學集)이 들어와서, 문장에 새로운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현종(顯宗)⋅숙종 간의 박세당(朴世堂, 號 西溪)⋅김창협(金昌協, 號 農巖)⋅김창흡(金昌翕, 號 三淵) 등은 송시(宋詩)를 즐기어, 명시(明時)를 즐기던 청천(靑泉)이나, 청시(淸詩)를 따른 이이(二李, 李德懋⋅李書九)와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 등 사가(四家)의 지반을 닦고, 천재적 시인 신위(申緯, 號 紫霞)에 와서 집대성되었다. 정조 때에는 규장각(奎章閣)을 두고 학자를 길렀으니,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서리수(徐理修) 등이 등용되었었다. 문장가로는 황경원(黃景源)⋅서명응(徐命膺) 등 놀랍게 재주있는 이들이 나왔다. 특히 이 시기의 한문학의 특색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작품을 존중하는 기풍이 차츰 짙어졌다. 먼저 말한 동문선 등의 편찬도 우리 나라 시문을 모은 것인데, 이어 동인시화(東人詩話) 같은 시평(詩評)을 모은 것이 나오면, 동인문보(東人文寶)⋅동문수(東文粹)⋅청구풍아(靑丘風雅)⋅대동시림(大同詩林)⋅해동유주(海東遺珠) 등의 편찬된 것은 한문학에 있어 조선 중심의 반성과 내 것으로 돌아오는 생각이 움트는 발걸음이었으니, 일찌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명승(名勝) 고적에 관한 시문을 채록한 것은 또한 같은 정신의 발로이었다.

훈민정음 창정 후 각종 문적의 언해(諺解)가 나오더니, 임진란 뒤에는 문학에 있어서도 새로이 자기를 각성하여, 국민문학으로서 길을 잡아들였다. 이지적이고 유연(悠然)하던 데서 감정적이며 실질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대부분 중국의 패사(稗史) 소설을 본받았다. 선조 때의 허봉(許篈)의 해동야언(海東野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등은 특히 재미있는 얘기이면서, 또 사실(事實)을 전하여 주는 것이 많다. 임진 후에는 한문으로는 유성룡(柳成龍, 號 西厓)의 임진⋅정유의 전란 기록인 징비록(懲琵錄)이 뛰어나고, 이만추(李萬秋)의 임진록(壬辰錄)은 순 국문으로 왜란 때의 조헌(趙憲)⋅이순신의 전략과 서산대사(西山大師, 休靜)⋅사명당(四溟堂, 松雪)의 충성을 서술한 것으로, 또 그의 곽재우전(郭再祐傳)과 함께 군담(軍談) 문학으로 대표이었다. 임진⋅병자란을 지나며, 그 사이 한문 소설에 있어, 수필체(隨筆體)로 청강잡저(淸江雜著)와 전기체(傳記體)에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운영전(雲英傳) 등이 있으며, 사회 문제를 소설화한 허균(許筠)의 홍길동전(洪吉童傳)은 특히 걸작이었다. 또 병자란 때의 나만갑(羅萬甲)의 병자록(丙子錄)은 난중의 사실을 간요 정확하게 기록하였고, 난 후의 임경업전(林慶業傳)은 장군 면목을 뚜렷이 전하는 작품으로 볼만하다. 작품 제작에 한문을 쓰는 한편 국문으로 작품을 썼으니, 투가 한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며, 또 대개는 작자를 알기 어려운 것들이 많으나, 차츰 평민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특히 김만중(金萬重, 號 西浦)이 자기의 어머니를 위하여 지은 구운몽(九雲夢)과 또 그의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일대의 걸작이었다. 홍루몽(紅樓夢)의 몽자(夢字)를 본딴 소설이 많이 나왔으니, 구운몽은 그 대표요, 옥루몽(玉樓夢) 또한 지금도 즐겨 읽은 작품이다. 이와 함께 민담(民譚)⋅설화(說話) 등이 많이 소설화되었다. 민담으로는 콩쥐팥쥐전과 장끼전(雄雉傳) 등이 있고, 설화로 심청전(沈淸傳)⋅흥부전(興夫傳) 등 여러 가지가 소설로 꾸며져서 시정(市井)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어 큰 재미를 주었다. 대개 이런 작품에 나타난 사상은, 교훈적으로 나쁜 짓을 말고 좋은 일을 권한 것이다. 영⋅정 간의 한문학이 청의 영향을 받았으나, 정조는 패관 소설류를 배격하고 경학에 치중하였으나, 안정복의 잡동산이(雜同散異)에도 중국 소설에 흥미를 가졌던 사실이 전해지며 정조 때 이덕무도 소설을 배격하면서 연경에 갔을 때 소설책을 사 왔다. 이때의 한문 소설은 대개 구운몽과 옥루몽의 아류 정도의 작품이 허다히 나왔으나, 영조 때 김도수(金道洙)의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만은 오늘까지 전한다. 또 시정사(市井事)를 주제로 한 소설도 많이 나왔으나, 영조 때의 위대한 학자며 문장인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속의 허생전(許生傳)과 또 양반전(兩班傳)은 세상의 어지러움과 정치에 관계하던 양반들을 끄집어 비웃었으니,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되 소설로도 탄복할만큼 잘 되고, 오히려 우리 말로 안 된 것이 아까울 뿐이다. 우리 글로 저술된 것으로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은 가족제도에서 빚어진 계모(繼母)의 학대를 그린 동화풍(童話風)의 것이요, 중국 기봉(奇逢) 소설에 따라 옥환기봉(玉環奇逢)을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것이 많이 나왔고, 작자 미상하며 어느 때 제작됐는지도 잘 모르는, 노래체로 된 춘향전(春香傳)이 있으니, 이것은 가장 널리 민중의 애착을 받아온 것이요, 그와 비슷한 숙향전(淑香傳)⋅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등이 나와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널리 읽히어지고, 불려진다. 춘향전은 장편시체로 되어 창극(唱劇)으로 불리며, 그 속에 흐르는 정신은 평등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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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春香傳)
춘향전(春香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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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에 왕래하던 사신들의 기록한 기행(紀行)으로 연행록(燕行錄)이란 것이 많이 나타났으나, 그 중에서도 숙종 38년(1712) 행사(行使)한 김창업(金昌業, 號 老稼齋)의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 영조 41년(1766) 홍대용의 담헌연행기(湛軒燕行記)와 정조 4년(1780)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은 더욱 유명하며, 또 열하일기는 문학으로서 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서도 귀중한 서술이다. 이와 방향을 달리 임진란 후에는 선조 40년(1607)에서 순조 11년(1811)까지 일본에 왕래한 사신들의 기행이 많이 남아 있으나, 일본에 잡히어 갔다온 강항(姜沆, 號 睡隱)의 간양록(看羊錄)이 가장 유명하다.

선조 때로부터 우리 말로 된 노래 즉 단가(短歌)가 발달되었다. 그 노래에는 강호(江湖)의 풍광을 즐기며, 현실 세상을 피해 나가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다른 한편 교훈적인 것을 노래에 많이 읊었다. 여기에는 명가(名歌)를 남긴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특히 신흠(申欽, 號 象村)⋅박인로(朴仁老) 등이 유명하다. 병자란 뒤에는 난세의 정경을 그린 명작이 많았다. 더욱 현종⋅숙종 연간은 단가의 극성기로 주의식(朱義植)⋅김창업(金昌業)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임진란 후에 출생하여, 현종 때까지 난리와 전쟁 틈에서 유배(流配)와 고초를 받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지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노래는 그대로 아름다운 노래로 향기로운 풍을 전하여 준다. 더욱 그의 어부사(漁父詞)는 유명하였다.

압개에 안개 것고 뒬뫼해 비침다

배떠라 배떠라 밤물은 거의 듸고 남물이 미러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江村)은 갓고지 먼비치 더욱됴타

(孤山 漁父詞의 一節)

영조 이후 단가를 노래로 부르도록 곡조를 붙였으니, 이것을 시조(時調)라 하였다. 이 때는 작가요 가객(歌客)인 김천택(金天澤, 號 南坡)의 청구영언(靑丘永言)과 김수장(金壽長, 號 老歌齋)의 해동가요(海東歌謠) 등이 나와서 시조문학의 정리와 집대성을 기하였다. 같은 때의 작가로는 조명리(趙明履, 號 蘆江)의 작품은 뜻이 선명하고 안계가 넓어 귀히 여길만하다.

음악은 영⋅정 간의 문운 부흥의 기세를 따라, 서명응(徐命膺, 號 保晩齋)이 정악(正樂)에 뜻을 두고, 대악전후보(大樂前後譜)를 찬술하여 세종⋅세조 양조의 악제(樂制)를 검토하였으나, 쇠퇴하는 일로였고 실제 악학(樂學)은 잡과로서 서얼(庶孼)⋅중인(中人)에 맡기었으며, 무악(舞樂)의 공인은 천인으로 천대하는 정치 사회의 사정이 음악 발전을 저해하였으며, 또 특수한 예속적인 기악(妓樂, 女樂)이 있었고, 민요 시조와 함께 대중을 즐기게 하는 창극(唱劇)이 발전하여 소설이 창극(唱劇)에 이용되었다. 이로서 철종 때에는 춘향가(春香歌)⋅박타령⋅토끼타령⋅심청가(沈淸歌) 등을 노래로 불렀다. 가객(歌客,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는 신재효(申在孝)가 명인이었다. 일반에는 잡가(雜歌)⋅타령이 성행하였으나 그 내용은 염세적(厭世的)인 경향이 많았다.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와 박효관(朴孝寬)의 가곡원류(歌曲源流)는 문학도 쇠퇴하는 말기의 유명한 시가 시조집이다.

일반 회화에는 선조 때의 윤의립(尹毅立, 號 月潭)은 묵화산수도(墨畵山水圖)에서 웅경(雄勁)한 필치를 보인 대가였다. 같은 때의 어몽룡(魚夢龍, 號 石谷)은 매(梅)를 잘하고, 이정(李霆, 號 灘隱)은 죽(竹)에 묘미가 있었고, 황집중(黃執中, 號 影谷)은 포도(葡萄)에 뛰어났으므로, 이들을 당시에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진 이후에는 그림의 격이 떨어진 감은 있으나, 다채로운 화가의 배출을 보이었다. 인조 조의 조속(趙涑, 號 滄江)은 매죽(梅竹)⋅영모(翎毛, 鳥獸圖)에 특기를 보이고, 청록산수도(靑綠山水圖)와 묵화산수도(墨畵山水圖)를 남긴 이증(李澄, 號 虛舟)은 정치(精緻)한 화풍을 지니었던 일대의 대가이었으며, 김명국(金明國, 號 蓮潭)은 호방(豪放)한 필법으로 산수와 인물에 능하였다. 이어 효종 때의 허목(許穆, 號 眉叟)은 묵죽(墨竹)에 고아(高雅)한 고풍을 남기고, 현종 조의 김치(金埴, 號 竹西)는 동물을 잘 그리고, 숙종 조의 윤두서(尹斗緖, 號 恭齋)는 산수⋅인물⋅조수⋅화훼(花卉)에 능난하여 일대의 대가이었다. 영조 조에는 청의 구영세(仇英世)의 밀화풍(密畵風)을 따른 김득신(金得臣, 號 兢齋), 산수를 잘 그린 정선(鄭敾, 號 謙齋)과 함께 삼재(三齋)의 한 사람인 심사정(沈師正, 號 玄齋)은 산수화에 웅장한 기풍이 깃들이고, 인물⋅화훼⋅영모에도 능하였다. 그는 실로 후기의 제일인자이었다. 그의 천강산수도(淺絳山水圖)와 추포도(秋圃圖)는 그의 훌륭한 작품이다. 당시 이에 맞설 사람은 김홍도(金弘道, 號 檀園)로, 그는 모든 그림에 그 묘한 수법을 볼 수 있으니, 수선도(水仙圖, 絹本着色)는 인물화로서 걸작이요, 부채에 그린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도 아담한 소품화로서 높이 칠 수 있으며, 특히 그의 그림이라 전하는 투견도(鬪犬圖, 紙本墨畵)는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 음영의 법을 갖추어 사실적인 것은 교묘하기가, 근세 회화사상 전후에 그 비길 바가 없다. 또 최북(崔北, 號 七七)의 산수, 강세황(姜世晃, 號 豹菴)의 산수⋅사군자 등이 유명하며, 변상벽(卞相璧, 號 和齋)은 화훼⋅영묘⋅곤충에 충실히 사실풍을 보이었다. 순조 조의 신위(申緯, 號 紫霞)⋅김정희(金正喜, 號 秋史)⋅이인문(李寅文, 號 古松流水舘道人) 등이 나왔으니, 이들도 산수⋅사군자에 전심한 남화파이었다. 그러나 남계우(南啓宇, 號 一豪)는 화조 특히 나비를 잘 그리어 남나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풍속화(風俗畵)에 능난한 신윤복(申潤福, 號 惠園)은 시정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잘 그리어, 후기 화가 중에서는 가장 평민적이며, 필채든지 구상에 있어 새로운 맛을 풍기어, 오늘날 높이 평가된다. 헌⋅철 양대에도 남화풍의 화가들이 속출하였으나, 철종(哲宗) 때의 장승업(張承業, 號 吾園)은 대표적이었고, 그들은 대개 산수⋅화훼⋅어개(魚介) 등을 즐기어 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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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죽도(墨竹圖) 이정(李霆)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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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산수도(雪中山水圖) 연담(蓮潭)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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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겸재(謙齋)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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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탐매도(雪中探梅圖) 심사정(沈師正)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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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견도(鬪犬圖) 단원(檀園)그림
투견도(鬪犬圖) 단원(檀園)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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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도(風俗圖) 단원(檀園)그림
풍속도(風俗圖) 단원(檀園)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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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희묘도(噪雀戱猫圖) 화재(和齋)그림
조작희묘도(噪雀戱猫圖) 화재(和齋)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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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도(風俗圖) 혜원(惠園)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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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이후 부흥된 건축으로는 정조 20년(1796)의 수원성(水原城) 구축이 유명하니, 이것은 건축 유물로만이 아니라 청나라를 통하여 받아들인 서양 기술로 쌓았으며, 특히 화홍문(華虹門)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형태가 기교 아름다우며, 주위의 경승과 어울리는 정취는 끝없이 아름다운 그림 같다. 또 장안문(長安門)과 팔달문(八達門)은 중층루(重層樓)를 세우며, 그 앞에 옹성(甕城)을 쌓았으니, 옹성은 서양식 축성법에 따른 것이다. 영변(寧邊)의 남문(南門)⋅안주(安州)의 청남루(淸南樓), 의주(義州) 남문(南門) 등은 부흥기의 우수한 작품이다. 궁전은 고종 7년(1870)에 대원군(大院君)이 힘써 지은 것이고, 경복궁(景福宮)은 말기 건축의 기념될 것으로 규모 크고 장려하다. 창덕궁 안의 낙선재(樂善齋)는 헌종(憲宗) 13년(1847)에 건축되어 아담하고 퍽 시정의 향취 있으며, 또 인정전(仁政殿)은 장식과 양식이 후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그 모든 조건은 경복궁 건축에 계승되었다. 경주 동경관(東京館)과 성천(成川)의 동명관(東明館)은 객사(客舍)의 대표적인 것이요, 사고(史庫)로는 임진 후에 이룩한 오대산(五臺山)의 것이 볼만하며, 서울⋅대구⋅경주⋅개성 등지에 문묘(文廟)⋅대성전(大成殿)은 다 임진 직후에 건축되어 오늘까지 장대한 결구(結構)를 보인다. 불교 건축은 초기보다 규모 장대한 건축이 이룩 되어 전등사(傳燈寺, 江華)⋅쌍계사(雙溪寺, 河東)⋅화엄사(華巖寺, 求禮)의 대웅전(大雄殿)과 해인사(海印寺, 陜川)의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단층(單層)이요, 화엄사의 각황전(覺皇殿)⋅장안사(長安寺, 淮陽)의 대웅전, 사성전(四聖殿)과 법주사(法住寺, 報恩) 대웅전 등은 중층(重層)이며, 금산사(金山寺, 金堤)의 미륵전(彌勒殿)은 삼층으로 다 규모가 크며, 법주사의 팔상전(捌相殿)은 다섯층의 탑파(塔婆)로써 구조 안정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탑(木塔)으로 고대 조선 목탑의 구조를 알게 한다. 석조(石造) 조각의 유물은 대체로 보잘것 없으며, 근근히 도갑사(道岬寺, 靈巖)의 도선국사비(道詵國師碑)를 들 수 있을 뿐이고, 대체로는 쇠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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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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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후기에 와서는 별로 보잘 것이 없으나, 금산사 미륵전에 안치된 목조(木造) 미륵상(彌勒像)이 본존(本尊) 높이 약 30척 협시불(脇侍佛) 높이 25척으로 우수한 대작이다. 법주사의 석가 삼존상(三尊像)이나, 도갑사⋅쌍계사에도 불보살상(佛菩薩像)이 남아 있으며, 보현사(普賢寺, 靈邊)의 목조 보살상은 자세도 잘 정돈되었으며, 그 풍모(風貌)의 아담함은 근세의 걸작이다. 불화(佛畵) 또한 쇠퇴하여 미술품으로 볼만한 것을 남김이 없다. 공예는 초기에는 볼만한 것도 있었으나, 그 잔존함은 오히려 일본에서 찾을 수 있으니, 대개 임진란을 계기로 일본에 전래된 것이고, 조선 안에서는 역시 쇠퇴하고 말았다. 금속 주조(鑄造)에서 종을 보면,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종은 몸체가 좀 작으나 장식 풍려하고, 기공(技工)이 웅장한 좋은 작품이다. 이에 따라갈 만한 것으로는 유점사(楡岵寺) 종이니, 이것은 몸체가 더 작으나, 잘 된 것이다. 기와의 제조는 임진란 후에는 더욱 졸악(拙惡)하여 양식과 문양은 전대(前代)에 비할 바가 없고, 오직 기왓장에 제작(製作) 연유(緣由)와 연호(年)를 기입함이 한 특색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함께 도자 기술은 고려에서 변하여 생태된 백자(白磁)가 퍽 아담하였으나, 임진란 때 도공(陶工)들이 많이 일본에 잡히어 가서 아름다운 기술을 전하여 근세 일본의 도자기술 발달에 크게 이용되었었다. 국내에서 세종 때를 극성기로 특히 광주(廣州)의 분원요(分院窯)에서 나온 것은 상지상품(上之上品)으로 유백색에 담긴 그윽한 정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 풍경과 아울러, 끝없는 슬픔을 가벼이 자아 내었다. 더욱 살이 얇은 것은 경쾌한 곡선과 함께 깊이 가라앉지 않는 서러움을 새삼스러이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근세로 내려오면서 쇠퇴하는 기술을 만회할 방도는 없었다. 이와 함께 일상 생활에 쓰인 항아리⋅병⋅베개⋅향로⋅꽃분⋅필통⋅연적 등의 자기와, 목공(木工)에 이층장⋅삼층장⋅혼함(婚函)⋅문갑(文匣)⋅연상(硯床) 등은 나무결 고운 것을 골라서 만들고, 문자⋅화조(花鳥) 등을 새기었으며, 주칠(朱漆)⋅옻칠(黑漆) 또는 영산홍빛(映山紅色)의 칠을 하고 주석장식을 하며, 또는 자개(螺鈿)를 박았으니, 그 호화로운 수공예의 일단을 상상할 뿐더러, 화각(華角) 공예술은 가구면에 채색으로 문양을 그리고 그 위에 쇠뿔(牛角)을 얇게 켜 발라서, 밑에 그린 그림이 비치게 한 것이니, 이것은 조선의 독특한 장식 기술로, 이 모든 것이 우리 공예 미술에 있어 우아한 정취를 빛내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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