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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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1차
  • 제Ⅷ장 조선 문화 후기(1864~1910)
  • 1. 국제 무대에의 진출

1. 국제 무대에의 진출

대원군은 10년간에 조선 말기의 흩어져 가는 사회를 개혁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때마침 밖으로는 서구(西歐)의 세력이 사면에서 근접하고 있었다. 철종 11년(1860) 청국과 로시아 사이에 북경조약이 맺어지자, 조선은 비로소 로시아와 국경을 접하였다. 고종 원년(1864)에는 로시아인 수명이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교(通交)를 청하였으니, 대원군은 당황하여, 서양 사정을 잘 아는 천주교도를 이용하여, 로시아의 근접을 물리치려 하였다. 또다시 로시아 사람 수십 명이 고종 2년(1865) 경흥부에 와서 함경 감영(咸鏡監營)으로 오려는 것을 경흥 부사(府使) 윤섬(尹䀹)이 외국인의 입국을 허하지 못한다고 막아 돌려 보냈으나, 뒤미쳐 다시 와서 감영에 통하기를 강청(强請)하매, 90일 안에 다시 회답하기를 기약하고 돌려 보냈다. 이 때 교도 홍봉주(洪鳳周)⋅김만호(金晩浩) 등은 대원군에게 상소(上疏)를 하여 로시아를 물리치려면 영불(英佛) 세력과 연맹할 뿐이라 하였다. 대원군은 남종삼(南鍾三)에게 로시아의 세력을 물리칠 천주교 사교(司敎)를 서울로 부르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서울 집합은 지연되고, 교도들은 교세를 확장하려 함에 열중하였으니, 성급한 대원군은 교도들의 애국심을 의심하고, 돌변하여 양학(洋學) 반대파의 배격하는 논책(論策)에 좇아, 교도 탄압이 개시되었다. 고종 2년 12월 29일(1865, 2月 14日)부터 교도들을 잡기 시작하였다. 홍봉주⋅베르느⋅정의배(丁義培)⋅브레타니엘(Bretiniers)⋅남종삼과 그의 부친 상교(尙敎)⋅보류(Beaulieu)⋅도리(Dorie) 등이 잡히어 처형 당하였으며, 그 외에도 양인(洋人) 선교사는 도합 12명이나 도륙을 당하였고, 조선 교도의 처형은 허다한 수효로, 많은 사람이 순교하였다. 이때 영국 상선 노라 호(Rona 號)가 해미(海美, 忠淸道) 부근에 왔었고, 지방에 숨어 있던 신부 리델(Ridel)⋅페론(Feron)⋅가레이(Calais) 등은 이 사정을 프랑스 지나해(支那海) 파견 함대 사령관 로제(Reze) 감독에게 전하였다. 고종 3년(1866) 8월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오니, 조선군은 그에 대적하여, 충돌을 일으키었으나, 프랑스 함대는 강화를 일시 점령하였을 뿐, 자기네들의 사정으로 철퇴하였다. 또 태평양을 건너오는 미국은 남경(南京) 조약 후 국회에서는 조선과 일본에 시작을 개척 하였다. 고종 3년 5월에 미국 배 써프라이스 호(Surprise)가 철산(鐵山, 平安北道) 선사포(宣沙浦) 앞바다에 난파하자, 선장 이하 선원을 구조해서 중국으로 보냈다. 그 후 미국인 소유 제네랄 써맨 호(General Shermen)가 대동강에 와서 주민들에게 폭행을 함에, 조선군은 이를 불을 질러 부셔버리었다. 그 해 섣달 미국서는 워츄셋트 호(Wachtsett)를 보내어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으나, 소득이 없었고, 5년(1868) 3월 쉐난도아 호(Shenandoah)가 황해⋅평안 양도 해안을 조사하였으나 헛되이 돌아갔다. 다음 4월에는 오펠트(E. Oppert) 일행이 아산만(牙山灣, 忠淸道)에 와서 덕산(德山)으로 들어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墓)를 파헤치다가 달아났다. 오펠트는 다시 북상(北上)하여, 인천 앞바다의 영종도(永宗島)에 상륙하였으나 곧 도주하였다. 고종 7년(1870) 프로시아(Prussia) 주일(駐日) 공사(公使) 쁘란트(von Brandt)가 부산에 와서 통교를 요청했으나, 그대로 허행하고 돌아갔다. 다시 8년(1871)에는 미국이 청국을 통하여 조선과 통교하려 함에 또 거절하였으나, 미국 함대는 아산만과 남양만(南陽灣)을 측량하며, 강화 손돌묵(孫乭項)에 왔을 때 사격하여 전단(戰端)을 열었으나, 미국이 강화 수로(水路)를 막고 있어, 우리는 곤난을 당하였다. 그들은 40여일 만에 중국으로 향하여 떠나갔다. 대원군은 국내 개혁과 함께, 프랑스와 미국 함대(艦隊)가 강화에서 물러감에 외국의 세력을 가벼이 보며, 겸하여 천주교 박해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동안 근대적인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던 일본이 통교하려 함에, 조선서는 전례(前例)에 없는 일이라고, 일본의 교섭을 배격하였다. 고종 12년(1875)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는, 강화도 동남쪽에 있는 난지도(蘭芝島)에 와서, 도전(挑戰)하는 듯 우리들에게 거만한 태도로 행동을 하자, 곧 그에 포격(砲擊)을 하였다. 일본은 이것을 기회로 고종 13년 조선에 전권대사(全權大使) 구로다(黑田淸隆, Kuroda) 일행을 보내어,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의 체결을 요청하였다. 당시 우의정 박규수(朴珪壽)는 개국(開國)을 주장하여, 강화에서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를 맺으니, 이것을 강화조약(江華條約)이라 하며, 조약에 의하면 부산⋅원산(元山)⋅인천(仁川)을 개항(開港)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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