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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의 생활
  • 1. 삼국의 형성과 통일 국가의 출현

1. 삼국의 형성과 통일 국가의 출현

[고대 국가 건국 전설]

* 고구려의 주몽 전설, 백제의 온조 전설, 신라의 박 혁거세 전설은 부족 국가에서의 집권화 전설이며, 삼국이 고대 국가로 등장하게 된 것은 고구려는 1세기 중엽, 백제는 3세기 중엽, 신라는 4세기 중엽의 일이었다.

고구려의 발전

고구려가 고대 국가 체제를 이루게 된 것은 1세기 중엽 태조왕 때의 일이었다. 태조왕은 안으로는 지배 체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북쪽의 현도군을 쳐서 푸순 방면으로 쫓고,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키고, 남쪽의 낙랑군을 자주 쳐서 크게 국위를 떨쳤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발전은 자연 대륙 민족과의 충돌을 가져 와서, 동천왕 때에는 위의 관구검의 침입을 받았고, 고국원왕 때에는 선비족 모용씨의 침입을 받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에 꺾이지 않고, 소수림왕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여서 정치 체제를 갖추는 등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다.

미천왕 14년(313)에는 낙랑군을 쳐 없애고 대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였으며, 광개토왕 때에는 후연을 쳐서 랴오뚱을 차지하고, 멀리 숙신까지 어울렀으며, 남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의 땅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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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
광개토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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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수왕은 남하 정책을 써서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와 신라를 자주 쳐서 국토를 크게 넓히어 고구려 전성 시대를 이룩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의 국토는 남쪽으로 남양만에서 죽령을 잇는 선, 서쪽으로 랴오허 강, 북쪽으로 북만주, 동쪽으로 연해주에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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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성기의 지도
고구려 전성기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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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쓰자, 백제와 신라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종의 공수 동맹인 나⋅제 동맹을 맺게 되었다.

백제의 발전

백제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 것은 3세기 중엽 고이왕 때부터이다.

고이왕은 관제를 마련하고 6좌평을 두어 국무를 분담하게 하고, 16등의 관품과 관리의 복색 제도를 마련하고, 법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근초고왕 때에는 마한의 전부를 차지하고, 북으로 고구려를 쳐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이와 같이 항상 고구려와 다투다가, 개로왕 때에는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서울인 한성이 함락되고, 왕 자신이 전사하게 되자, 아들 문주왕은 도읍을 웅진(지금 공주)으로 옮겨 나라를 유지하였다.

그 후, 성왕은 도읍을 사비성(지금 부여)으로 옮기고, 불교와 학예를 장려하는 한편, 중국 남조 및 일본과 통교하면서 국력을 크게 길렀다.

또,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 힘을 합하여 고구려 땅인 한강 유역을 쳐서 이겼으나, 신라가 이 곳을 독점하자, 성왕은 분개하여 신라를 치다가 관산성(지금 옥천)에서 전사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100여 년 간 지속되던 나⋅제 동맹은 완전히 깨어지고, 서로 대립하여 싸우게 되었다.

신라의 발전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 것은 4세기 중엽 내물왕 때부터였다. 내물왕은 낙동강 동쪽 경상도의 거의 전 지역을 통합하고, 왕권의 기반을 공고히 하면서 왕호를 마립간이라 고쳐 권위를 높였으며, 중국 전진과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그 곳의 문화 수입에 노력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중국 문화를 활발히 받아들여 국호를 신라라 정하고 왕호를 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군현 제도를 채택하는 한편, 우산국(지금 울릉도)을 복속시켰다.

다음, 법흥왕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며, 불교를 공허하여 사상 통일을 꾀하고, 처음으로 연호를 세워 건원이라 하는 한편, 금관 가야를 복속시켰다.

다음, 진흥왕 때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중국과 직접 교통하는 통로를 열었으며, 낙동강 유역의 나머지 가야 제국을 쳐서 합하고, 북쪽으로 함흥 평야에 진출하여 국토를 크게 넓혔다. 그 기념물로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진흥왕 순수비는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의 네 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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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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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시대의 삼국 형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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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연맹

낙동강 하류 지방에 6가야가 성립된 것은 3세기 중엽의 일이다. 그 중, 세력이 강한 가야를 맹주로 삼아 연맹체를 이루었는데, 김해에 있던 금관 가야와 고령에 있던 대가야가 가장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 가야 연맹은 일본, 중국과 통상하며 신라와 대립하였으나, 신라 법흥왕 때에 금관 가야가, 또 진흥왕 때에는 대가야가 신라에게 병탄되었으며, 다른 가야들도 뒤이어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이 밖에도 제주도에 탐라국과 울릉도에 우산국이 있었으나, 후에 탐라국은 백제에 속하게 되었고,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때에 이사부의 정벌을 받아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백제의 멸망

백제는 의자왕 때에 세력을 떨치면서 신라를 자주 침범하여, 신라 서쪽의 중심지인 대야성(지금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 북서경의 당항성(지금 남양)을 점령하고, 신라에서 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으려 하였다.

의자왕은 처음에는 훌륭한 정치를 베풀고 국력을 떨치게 하였으나, 차차 방탕과 사치에 기울어 국정이 문란해졌다.

이 때, 신라는 당에 요청하여 백제를 소정방으로 하여금 치게 하고, 신라에서는 김유신으로 하여금 쳐들어가게 하였다.

백제의 장군 계백은 황산(지금 논산)에서 신라군과 힘껏 싸웠으나, 이미 때는 늦어 패전하였고, 사비성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말았다(의자왕 20년, 660). 백제가 멸망한 후, 왕족 복신과 중 도침이 왕자 풍을 받들고 주류성(지금 한산)에서, 또 흑치상지가 임존성(지금 대흥)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켜 한때 200여 성이 이에 호응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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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낙화암
부여의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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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멸망

남북조 시대란 오랜 분열기를 겪어 오던 중국은, 6세기 말에 이르러 수가 천하를 통일하여 세력을 동쪽으로 뻗치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돌궐과 동맹을 맺고 수를 견제하려는 데서 수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즉, 영양왕 9년(598)에 수의 문제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으나 실패하였고, 영양왕 23년에는 양제가 100여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침입해 왔으나, 살수(지금 청천강)에서 을지문덕에게 참패하여 거의 전멸당하였다. 그 후, 양제는 2차, 3차로 군대를 냈으나 실패로 돌아가 수는 마침내 멸망하고, 당이 그 뒤를 이었다.

이와 같이 중국 대륙에서 당이 제국을 건설하고 있을 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국권을 장악하고, 안으로 국력을 결속하며, 밖으로는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때, 당은 신라를 돕기 위해 고구려로 하여금 그 공격을 중지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이를 거절하자, 보장왕 3년에 당 태종은 스스로 17만 대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와서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패전하고 돌아갔다.

그 후, 보장왕 20년에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승세를 타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고구려는 평양성을 굳게 지키어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 남생이 정권을 쥐자, 형제간에 정권 다툼이 일어나, 고구려는 지도층의 혼란으로 국세가 기울게 되었다.

이 기회에 나⋅당 연합군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어, 보장왕 27년에 당의 이적과 신라의 김인문이 평양성을 함락시켰다(668).

고구려가 멸망한 후, 검모잠이 왕족인 안승을 받들고 한성(지금 재령)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안승은 신라에 포섭되어, 보덕왕으로 봉한 바가 되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

당은 우리 땅에 야욕을 품고 공주에 웅진 도독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비롯하여 여러 도독부를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경주에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까지 지배하려 하였다.

신라가 당과 한때 연합한 것은 삼국의 통일에 그 목적이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당의 야욕에 격분하여, 백제 땅에서 당군을 몰아 내고, 안동 도호부를 만주로 쫓아 내어, 대동강과 원산이남의 땅을 통일하였다(문무왕 16년, 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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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해중 능침
문무왕의 해중 능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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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 통일은,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잃고, 민족 자체 문제 해결에 있어서 다른 민족을 개입시켰다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하나의 정부 아래 단일 민족으로서 발전할 토대를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포섭하는 데에 노력하여, 민족 통일의 결실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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