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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의 생활
  • 3. 통일 신라 시대의 사회와 문화

3. 통일 신라 시대의 사회와 문화

통일 신라의 정치

통일 신라 시대에는 왕권이 보다 강대하여졌으며, 김유신 등과 같은 강대한 귀족 세력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의 옛땅을 편입하여 영토가 넓어졌으므로, 통일 신라는 이러한 바탕 위에 정치 체제의 재편성이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삼국 시대의 제도를 계승하고, 그 위에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중앙에는 최고 기관으로 집사성을 두고, 장관에 시중을 임명하여 국무를 총리하고, 그 아래에 병부, 조부, 창부 등을 두고, 장관에 각각 영을 두어 국무를 분장하였다. 이 밖에, 귀족 회의의 의장격으로 상대등이 있었다.

전국은 신라 본토에 3주, 백제 옛땅에 3주, 고구려 옛땅에 3주 모두 9주로 나누고, 그 밑에 군, 현을 두었으며, 군, 현은 여러 촌과 향으로 나뉘었다. 주에는 도독, 군에는 태수, 현에는 영을 두었다. 이 밖에 주요한 지방 도시에는 5소경을 두어 서울이 남동쪽에 치우쳐 있던 불편을 덜고, 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특수 행정 구역인 부곡, 향, 소를 두었다. 그리고, 지방의 일반적 말단 행정 구역은 촌이었으며, 토호를 촌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한편, 토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각 주에서 한 사람씩을 인질로 서울에 와서 머무르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고려 시대에 행한 기인 제도의 기원이 된 것이다.

군사 제도는 정을 10으로 늘려, 각 주에 1정씩을 배치하였는데, 그 중 한산주는 넓어 2정을 두었다. 그리고 서울에는 9서당을 두어 왕에게 직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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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의 9주와 5소경도
통일 신라의 9주와 5소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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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의 사회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골품 제도는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신라 귀족에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 포섭되었다. 즉, 백제 사람은 제10관등인 대나마까지, 고구려 사람은 제7관등인 일길찬까지의 벼슬을 주어 관리로 등용하였다.

귀족들은 관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분배받아 영화를 누렸으나, 일반 백성들은 촌에 편입되어 촌주를 통하여 국가의 지배를 받았고, 국가에 대하여 조, 용, 조를 부담하였다. 향, 소, 부곡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천민으로 취급되어 그 부담은 더욱 컸다.

명절로는 설, 정월 보름, 추석이 있었다. 정월 보름에는 약밥을 먹고, 또 그것을 까마귀에게 주는 풍속이 있었으며, 추석은 가배(한가위)라 하여 1년 중 가장 큰 명절이었다.

통일 신라의 종교

통일 신라 시대에도 삼국 시대와 같이 고유 신앙이 행하여졌으며, 불교도 한층 발전하여 그 빛을 발휘하였다. 사천왕사, 불국사, 봉덕사 등 많은 절이 건립되고 종, 탑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 때 국가에서 거액의 비용을 내고, 또 사전을 주었다. 그리고, 나라에는 국통, 주에는 주통, 군에는 군통 등 승관을 두어 중을 다스리고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가 융성하여지자, 고승이 배출되고, 여러 종파가 생겼다. 문무왕 때의 원효는 법성종(일명 해동종)을 창시하여, 우리 나라의 전통적 생활과 융합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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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불교
신라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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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많은 승려들이 당에 건너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왔다. 그 중 성덕왕 때의 혜초는 당에 건너가 불교를 연구하고, 다시 인디아에까지 갔다 왔는데, 그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이 현재까지 전한다.

통일 신라의 학문과 교육

통일 신라 시대에는 당과 자주 접촉하면서, 그 곳 문화를 받아들여 제반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신문왕 2년에는 국학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이 국학은 경덕왕 때에 태학감이라 고쳐지기도 하였는데, 여기에는 교수로 박사와 조교를 두고, 수업 연한은 9년으로 하였다. 한편, 원성왕 4년에는 국학에 독서 3품과를 마련하여, 학생들의 독서하는 정도에 따라 상, 중, 하의 3등급을 매기어 관리 등용에 참고로 하였다.

학술이 발달함에 따라 한문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 강수는 외교 문서에 능하였고, 설총은 경사와 문장에 능하였으며, 또 이두를 완성하였다. 김대문은 계림잡전, 고승전, 화랑세기 등을 저술하였고, 최치원은 일찌기 당에 들어가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지금도 그의 저서인 계원필경집이 전하고 있다.

유학 이외에 산학, 천문학, 의학, 법률학 등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각각 박사를 두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 방면의 학술도 발달하여, 김암은 천문학과 병학에 능하였고, 말기의 도선은 풍수 지리설을 주장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향가도 매우 발달하여 중 월명사의 도솔가, 충담사의 안민가 등을 비롯하여 여러 수가 전하며, 진성 여왕 때에는 대구 화상과 위홍 등이 향가집인 삼대목을 편찬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의 예술

통일 신라의 예술은, 삼국 시대의 바탕 위에 당의 영향을 받아, 신라의 고유성을 지니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예술을 개척하여, 불교 예술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다.

건축으로 대표적인 것은 경덕왕 때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지었다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불국사의 석가탑(삼층 석탑)과 다보탑은 정교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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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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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삼층 석탑)
석가탑(삼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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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네모진 전실과 둥근 후실로 되어 있는데, 천장은 도움(dome)형으로 돌을 올려 쌓은 교묘하고 견실한 석굴이다.

이 밖에 안압지와 임해전 터, 유상곡수의 놀이를 하던 포석정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귀족들의 호화롭던 생활의 일모를 보여 주고 있다.

조각은 석굴암 안의 석가여래 좌상과 주위 벽의 관음상, 보살상, 입구의 인왕상 등이 우아하고 균형미가 있어 조각으로서는 동양에서 대표적인 예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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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면 관음보살상
십일면 관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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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왕릉 호석의 12지신상과 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이름높다.

공예품으로는 혜공왕 때 만들어진 성덕 대왕 신종을 대표로 들 수 있는데, 당초문 비천상과 머리에 새겨진 용의 머리의 조각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다. 이 밖에, 금동불로 백률사의 약사여래입상 등이 유명하다.

글씨에는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 성덕왕 때의 김생, 경문왕 때의 요극일, 신라 말의 최치원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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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의 글씨
김생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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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는 원성왕 때의 김충의가 이름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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