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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외 관계와 서양 문물의 전래

명과의 관계

태조가 즉위한 후부터 명에게는 사대의 예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과 명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였고, 이를 통하여 조공, 회사 형식의 공무역이 행하여지게 되었다. 이 밖에, 사절이 서로 내왕하는 기회에 뻬이징의 회동관이나 한양의 태평관 등 사신의 객관에서 사무역 활동이 행하여졌다. 또, 사대 사행은 대륙 문명 섭취의 유일한 수입로이기도 하였다. 이 통로를 통하여 중국 문화가 전해졌으며, 중기 이후에는 서양 문물이 흘러들어왔다.

명에 대한 조공을 위하여 국내의 금, 은, 인삼, 모시, 말, 종이, 자개 그릇 등을 거두어들이고, 한편으로는 명의 우수한 비단, 약재, 자기, 책, 예복 등의 물품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국내의 산업은 더욱 위축되는 결점도 있었으나, 귀족들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에 공헌한 바도 컸다.

국초의 대외 관계

고려 말부터 우리 나라를 노략질하던 왜구가 조선 초기에도 계속 해안 지대를 침범하자, 세종 대왕은 이종무로 하여금 그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양국의 외교는 끊어지고 말았다. 이에, 물자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된 쓰시마 섬의 도주가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통상을 간청하여 왔으므로, 세종 대왕은 제포(지금 웅천), 부산포(지금 부산), 염포(지금 울산) 등의 삼포에 왜관을 열어 여기에 한하여 무역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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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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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세종 대왕은 쓰시마 섬의 도주와 계해약조를 맺어 그들의 무역 활동을 규제하였으며, 일본의 실권자인 아시카가 바쿠후와 그 밖의 지방 토호와의 통교를 텄다. 이에, 왜인의 내조와 진상하는 공물이 많아져, 서울에는 동평관이라는 왜사의 객관이 마련되었다.

삼포가 개항된 후 이들 삼포에는 항거왜라는 거류민들이 생겨났는데, 이들 항거왜와 삼포민들 사이에 종종 충돌이 벌어지더니, 중종 5년에는 그들이 삼포에서 난을 일으켜 소동을 피웠다. 이것이 삼포 왜란으로 한때 국교가 두절되었으나, 임신약조에 의하여 다시 국교가 열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왜구의 침범은 그치지 않아 사량진을 습격하였고, 명종 때에는 달량포, 영암, 제주도를 습격한 을묘왜변이 벌어져 양국의 국교는 다시금 단절되었다.

임진왜란의 국난

1585년경에 일본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100여 년 간의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일본을 통일한 후, 대륙 침략의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가 대륙 침략을 꿈꾸게 된 것은 그의 과대 망상증에 의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국내에 남아 있던 전국 시대의 잔존 세력의 반항심의 방향을 해외로 돌림으로써 정권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 정략적 의도와 아울러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내란기를 통하여 닦은 전술과 무예로써, 또 새로 도입된 조총이란 신무기를 동원하여, 아무런 준비도 없는 우리 나라를 불의에 침입하였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을 때 정발과 송상현이 고군 분투하였으나, 대군의 침략을 꺾지 못하고 순국하였으며, 충주 탄금대에서의 신입의 분전도 헛되이 왕도는 왜군에게 짓밟히고, 그 선봉은 북으로 평양, 두만강 유역까지 침략해 들어왔다(1592).

민족의 항전

왜군의 승세를 꺾고 전세를 돌이킨 데는 명의 원병의 힘도 컸으나, 주로 우리 수군과 의병의 활동에 힘입은 바 컸다. 육지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에 해군은 연전 연승 개가를 올렸으니, 이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에 의한 것이었다. 장군은 거북선을 위시한 함선을 거느리고 옥포, 한산도, 부산포 등 각지에서 적의 해군을 분쇄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전라도가 무사하여 전쟁 중 식량의 보급이 가능하였던 반면, 적군은 서해로 북상하여 육군과 손을 잡지 못하게 됨으로써 그들의 작전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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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해전 경로
남해의 해전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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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국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매, 국민 중에는 민족적 의분에 불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의 곽재우,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 충청도의 조헌, 함경도의 정문부 등의 활약이 컸다.

그리고, 수도에 힘쓰던 승려들도 승병 운동을 일으켜 휴정(서산대사)은 묘향산에서, 그의 제자 유정(사명대사)은 금강산에서 각각 승병을 이끌고 명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 밖에, 승장인 처영도 권율을 도와 많은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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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활약도
의병 활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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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급습을 당하여 물러났던 관병도 이여송이 이끄는 명의 원병과 손잡고 전선을 정비하여, 박진은 경주성을 수복하고, 김시민은 반도 서부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진주에서 맞아 끝내 이를 고수하였으며, 권율은 후퇴하는 적을 행주에서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다.

명군의 출병으로 평양성을 내놓고 후퇴하던 왜군은, 민족의 항쟁 앞에 날로 불리해지는 전세에 당황한 나머지, 심유경의 화평 공작에 응하여 일시적인 강화가 성립되었다.

정유재란의 고난

4년을 두고 전개되던 종전 교섭은 일본측의 부당한 요구로 결렬되었으며, 그 간 반도 남부에 주둔하던 왜군은 재침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1597). 그러나, 이 때에는 우리측 군비도 퍽 정비되었을 뿐 아니라 명의 군대도 요소에 있어, 왜군의 북침은 전날과 같지 못하였다. 다만 수군은 이순신이 참소로 물러난 때를 틈타 서해안에 나가려고 공세를 취하였으나, 국가 위기를 타개하고자 다시 나타난 이순신 장군의 활동으로 명량에서 결정적인 패전을 당하였다. 전의를 상실한 왜군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명을 빙자하고 우리 나라에서 빠져 나가게 되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에 불타던 이순신 장군은 한 사람의 왜군도 그냥 보낼 수 없다 하여 나아가 싸우다, 불행히도 노량 해전에서 유탄을 맞아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이에, 적군은 겨우 빠져 나갈 길이 열리니, 전후 7년간에 걸친 난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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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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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의 의의

이 변란은 우리 나라는 물론, 극동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 나라는 전쟁터가 되었던 만큼 인명과 물자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비로 말미암아 국고는 고갈되었으며, 토지는 극도로 황폐하고 농민의 생활은 초근 목피로 연명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져 도둑이 횡행하였다. 건축물, 서적, 미술품 등의 문화재가 불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반면에 조총이 들어왔으며, 이로 인해서 이장손이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이 화차를 발명하였으며, 훈련도감이 생겨 국방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난으로 명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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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
비격진천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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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이 난으로 토요토미가가 망하고 새로 토쿠카와가 일어나서 바쿠후를 세워 정권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이 때 우리 나라로부터 도자기, 활자, 주자학 등이 전하여져 후대의 일본 문화에 끼친 영향이 컸다.

명도 이 난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여, 국력이 줄어들어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게 드디어 망하였다.

여진과의 관계

국초 여진의 침입이 잦아 태종은 일시 경성 이북의 땅을 여진에게 내주었으나, 세종 대왕은 김종서를 두만강 방면에 보내 여진을 쳐 6진을 설치하고, 또 최윤덕, 이천 등으로 하여 압록강 방면의 여진을 쳐 4군을 설치함으로써 국경선을 확립하였다 함은 이미 배운 바 있다.

조선은 여진에 대하여 이렇게 무력을 쓰는 한편, 회유 정책도 아울러 써서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그들의 소원인 교역을 허락하였다. 무역해 가는 물건은 쌀, 콩, 모시, 베, 금, 은, 농구, 식기 등의 생활 필수품이었고, 들여 오는 물건은 의복, 마필 등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신이 서울에 와서 머무르는 곳을 북평관이라 하였다.

여진은 임진왜란 때에 명이 만주의 주둔군을 조선으로 보낸 틈을 타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누루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616년 후금을 세웠다.

인조 반정과 호란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왜란의 상처를 정비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후금에 대비하기 위하여 도성 주변의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 후, 명의 요청으로 부득이 만주에 출병하게 되었을 때에 적극 간여를 피하는 등 신중한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폐하고, 아우를 살해한 허물을 잡혀 인조 반정으로 폐출되었다.

인조와 서인이 집권한 후 후금에 대한 강경 정책을 쓰게 되자, 이에 자극된 후금은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우리 나라를 공격하였고, 그 후 후금은 세력이 더욱 커져 1636년(인조 14)에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다시 침입하여 왔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 난은, 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데다가, 지도층이 당쟁에 골몰하여 국방을 소홀히 한 탓으로, 장만, 정충신의 활약이나 의병 운동을 일으켰던 정봉수, 이입 등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남한 산성에서 50여 일 간 버티던 조정은 청병의 공세에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삼전도의 비극 이후에도 임경업이 설원하고자 노력한 바 있었고,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적극적으로 북벌을 계획한 바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호란은 비록 왜란에 비하여 기간도 짧았고 전화가 미친 지방이 북서에 한하였으나, 약탈과 살육으로 입은 피해는 더 컸다. 한편, 청의 세조는 쇠약한 명을 공략하여 도성을 뻬이징으로 옮기고 전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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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산성 서장대
남한 산성 서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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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 관계와 백두산 정계비

1662년 청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우리 나라는 청에 대하여 사대의 예를 취하였으며, 의주, 중강, 회령, 경원 등에 국경 호시를 열어 교역하게 되었다. 정식 교역 장소를 통한 무역 이외에도 사대 사행을 통한 조공 무역이 있었고, 또 사행 왕래를 틈타 중강, 책문 등에서 사무역 활동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무역 활동에서는 의주의 만상과 평양, 개성의 상인들이 활약하였고, 우리 나라의 은, 인삼, 종이, 모시, 가죽과 저들의 비단, 당목, 약재, 서적 등이 교역되었다.

한편, 16세기 이후 꾸준히 시베리아 진출에 힘쓰던 러시아 세력이 1650년 대에 만주 북부 헤이룽 강에 미쳐 군사 기지를 건설하게 되자, 청국은 이를 토벌하고자 우리 측의 원병을 요구해 왔다.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원병을 북만주로 파송하여 러시아와 교전하게 하였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 한다.

러시아의 만주 출역은 이 지역을 여진인의 성역으로 간주해 오던 청국을 자극하게 되어, 청은 만주 주변의 국경선을 확정하여 철저히 경비하게 되었다. 숙종 때에 백두산에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는 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고종 때에 들어서 그 비문으로 인한 간도 귀속 문제가 대두된 바 있다.

서양 문물의 전래

서양에 관한 최초의 지식은 고려 말엽 이제현에 의하여 전해진 바 있었다. 그러나, 세계의 지리 지식을 비교적 자세히 얻게 된 것은 뻬이징을 왕래하던 사대 사행을 통하여 들어온 세계 지도에 의해서였다. 16세기 이후 서양 세력의 동방 진출의 역사 조류는 뻬이징에 밀어닥쳐 예수회 신부들에 의한 새로운 청⋅서양 문명이 자라고 있었다. 이 새로운 청⋅서양 문명이 우리 사행원들에 의하여 수입 소개되었다.

선조 때에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이광정이 유럽 지도를 얻어 오고, 선조와 광해군 때에 맛테오 릿치(Matteo Ricci)가 지은 천주실의가 흘러들어왔다. 그 후, 인조 때 정두원이 명에 갔다가 선교사로부터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의 기계와 천문서, 만국 지도, 서양 풍속기, 천주교서 등을 얻어 왔다. 또, 청에 인질로 갔던 소현 세자가 뻬이징에서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Adam Shall)과 사귀어 과학과 카톨릭 교에 관한 책을 얻어 오고, 효종 때에 김육이 사람을 보내어 역법과 산수에 관한 책을 얻어 온 뒤에는, 서양에 대한 지식이 식자들 사이에 차차 퍼졌다.

한편, 인조 때에 제주도에 표착하였다가 귀화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Weltevree)는 병자호란 때에 대포를 만들어 쓰는 법을 가르쳐 주어 큰 공을 세웠으며, 효종 때에 제주도에 표착하였다가 탈출하여 본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Hamel)은 표류기를 지어, 우리 나라의 사정을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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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 표지
하멜 표류기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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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물의 전래는 우리 민족에게 세계 의식의 확대와 자아의 각성을 이끌어 영⋅정 시대의 실학을 일으키게 한 배경이 되었다.

천주교의 전래

천주교는 16세기부터 중국, 일본에 전교되었으나, 우리 나라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 달리, 선교사들의 전교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손에 의하여 도입되고 연구됨으로써 이루어진 교회였다. 사대 사행을 통하여 서양 문물이 전래되는 가운데 천주실의 등 한역 교리서가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으며, 그것이 호기심에 끌려 서양 학문을 연구하던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그 가운데, 마침내 학문적 탐구욕은 신앙심으로 승화되어, 그 교리를 생활에 실천하게 되었다. 교리 연구의 중심 인물은 이벽 등 남인계의 소장 인물들이었으나, 최초로 입교한 이는 1783년 뻬이징에 들어갔던 이승훈이었다. 그는 귀국 후 동지를 모아 자율적으로 교회 조직을 이루어 포교 활동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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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천주교도들의 집회 광경
초기 천주교도들의 집회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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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사랑과 평등의 가르침은 유교적 질서를 위협하는 도전자였다. 따라서, 유교적 집권자들은 척사 위정을 내세워 맹렬한 천주교 박해 정책을 쓰게 되었다. 1784년 이후 100여 년 동안 한국 교회는 거듭 박해를 받아 왔으며, 만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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