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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도의 개편과 경제 생활의 발달

군제의 개편

두 번이나 큰 난을 치르는 동안에 국방 제도는 무너졌으며,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 국민 생활은 도탄에 빠쳤다. 이미 임진왜란을 겪은 때부터 국방 강화를 위한 긴급 대책으로 새로운 군제가 편성되어, 숙종 때까지는 5군영의 설치를 보았다.

국초의 5위가 왜란 중에 와해되자, 난중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5부의 장정을 뽑아 포수, 사수, 살수의 이른바 3수병을 훈련 배속시켰으며, 그 비용으로 새로이 삼수미를 전답에 부과하여 충당하였다.

그 후, 인조 때에 총융청, 수어청, 효종 때에 어영청, 그리고 숙종 때에 금위영이 새로 편성되었다. 5군영의 편성은 그때 그때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어서 통일성이 결여되어, 시일이 흐름에 따라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왜란 때 비변사가 최고 국가 기관으로 부활된 후에는, 군사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 전반을 관장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비정상적 정치 체제는 고종 초까지 계속되었다.

세제의 개혁

장기간에 걸친 전란과 당쟁에 얽힌 정치의 문란으로, 국가 토지 대장에 오른 전국의 전결 수는 왜란 전의 3분의 1에 불과하여 국가 수입은 격감하였다. 그리고, 군비의 확장과 복구 사업으로 국가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국가 수입의 증가를 기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세제의 개혁을 보게 되었다. 양전 사업을 추진하여 전결 수를 파악하는 한편, 전세 수납의 간편을 위하여, 인조 때에 와서는 영전법을 실시하였다.

농민들이 지방 토산물로 바친 공물도 폐단이 많았다. 즉, 공납하는 물품의 종목이나 납입하는 시기가 지방에 따라 미리 정해져 있었던 까닭에, 징수, 보관, 수송 등에 불편한 점이 많고, 중간에 낀 관리들의 협잡과 부정이 많았다. 이에, 그 폐단을 덜기 위하여, 공물도 전세와 같이 경작하는 토지의 결 수에 따라 매결에 얼마씩의 미곡을 바치게 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이를 대동법이라 한다.

일찌기, 이이와 유성룡이 이를 주장하였으나 그 실현을 보지 못하더니, 선조 41년(1608)에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선혜청을 두고,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하였다.

그 후, 효종 때에 김육의 주장으로 충청, 전라 양 도에도 실시하였고, 숙종 때 비로소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이 때의 대동미는 토지 1결에 쌀 12말을 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고, 또 쌀 대신에 포목이나 돈으로 대납하기도 하였다.

균역법의 실시

번상하여 현역에 종사하는 정남에게는 국가에서 녹봉을 지급하거나 보를 급여하여 생활을 보장하던 것인데, 이 제도는 차차로 무너져 마침내 일정한 보수를 받고 군역에 종사하는 직업적 군역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정남에게 군포라 불리는 포 2필을 부담시키고 역을 면하여 주었다.

국가 질서의 문란에 따라 두 필의 포마저 면하고자 역을 기피하는 무리가 속출하였으며, 일부 관료들은 군포 수납에 있어 갖은 방법으로 토색질을 일삼았다. 이미 죽고 없는 사람에게 군포를 받는 백골징포, 어린이를 장정으로 편입시켜 군포를 받는 황구첨정, 이사를 가고 없는 사람의 몫을 친척에게서 받아 내는 족징, 동리 사람에게서 받아 내는 동징 등의 악폐와 악법이 생겨 농민을 괴롭혔다. 이에, 군포의 양을 줄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자는 의견이 일어나, 영조 26년(1750)에 2필을 1필로 줄이고, 부족액은 어세, 선세, 염세와, 토지 1결에 쌀 2말을 받는 결작으로써 충당하였다. 이를 균역법이라 한다.

영⋅정조의 중흥 정치

양 난을 겪은 후 일부에서나마 제도의 개혁이 추진되고, 또 개혁을 모색하는 인사들도 나왔다. 때마침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청국 문화의 영향과, 서양 문물의 자극을 받아 신기운이 태동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영명한 영⋅정조 2대에 걸친 선정으로 큰 성과를 이루어 마침내 조선 문화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가 안정되었으며, 산업 활동이 크게 발전하였다. 영조는 당쟁을 억제하고자 탕평책을 썼으며, 학문을 장려하여 많은 도서를 편찬 간행하였다. 그리고, 사치와 무격 음사를 금하여 폐습을 타파하고, 형정을 개선하여 악형을 금지하고, 양반의 사사로운 형벌을 금하여 민생을 안정하게 하였다. 한편, 균역법을 실시하여 국민의 부담을 덜고, 농장을 장려하여 경제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으로 당쟁을 억제하고 산업 진흥, 혹형의 폐지, 문교 진흥에 힘쓰는 한편, 흠휼전칙과 자휼전칙을 정하여 걸호 및 난민 구제 사업을 폈다.

정조는 호학의 군주로 그 스스로가 홍재전서를 엮었거니와, 궁내에 규장각을 확충하여 많은 책을 편찬 간행하였다. 영⋅정조 2대의 70년간에 걸친 민본 정치로 조선 왕조의 문운은 다시금 세종대를 방불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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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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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발달

왜란과 호란으로 황폐한 농촌을 재흥하는 데는 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조정은 토지의 개간, 저수지의 수축, 조림, 양잠, 목면 및 구황 식물의 장려 등 농업 생산력의 증가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정조 때에는 저수지의 관리를 규정한 제언절목을 만들어 8도에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순조 초에는 관개에 쓰인 저수지의 수는 3500여 개소에 달하였다. 토지의 개간 면적도 늘어, 영조 2년에 122만 결이었던 것이 45년에는 145만 결이 되었다. 그러나, 지방 토호의 은결과 궁방전, 관둔전 등의 면세지의 격증으로 실제의 과세 면적은 줄어들었다.

양 난 후 남벌이 성행하여 산림이 황폐되므로, 정조는 송금절목을 만들어 바닷가와 강가의 30리 지역의 벌채를 엄금하고, 봉금 구역을 설정하여 산림 보호에 힘썼다.

당시의 구황 식물은 주로 고구마와 감자였다. 고구마는 감저 또는 남저라고도 불리었는데, 영조 39년에 조엄이 일본에서 구해 온 것이 우리 나라에 전해진 시초이다.

그 후, 이광려 등이 구황 식물로서 유용함을 깨닫고 재배에 노력한 결과 차차 퍼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재배법의 연구도 열심히 행해져 강필리의 감저보, 김장순의 감저신보, 서유구의 종저보 등이 나왔다. 감자는 마령서라고도 하고, 북쪽 청에서 들어왔다 하여 북저라고도 하였는데, 헌종 때에 널리 퍼졌다.

우리 나라 특산물인 인삼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많이 재배되었는데, 정조 때에 개성 상인이 그 재배법을 배워 개성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인삼을 원료로 한 홍삼이 중국인의 애호를 받았기 때문에, 수출을 목적으로 한 인삼 재배가 성행하였다.

교역의 발달

사회의 안정, 산업의 발달에 따라 교역 활동도 점차 활발해졌으며, 마침내 화폐의 유통을 보게 되었다. 서울에는 육의전과 각종 상점이 날마다 열렸으며, 개성, 대구, 평양 등 대도시에는 상설 시장이 생겼고, 각지에도 정기 시장이 성행하였다.

지방의 정기 시장에는 보부상이 돌아다니며 교역 활동을 폈고, 각 시장에는 객주, 거간, 감고, 전당업자가 생겨나 경제 활동을 도왔다.

대외 교역은 조공 무역에 의한 관무역과 여진족이나 일본인과의 교역을 위하여 국경 지대에 설치하였던 호시장에서의 사무역 활동이 있었다. 즉, 청과는 회령 개시나 경원 개시와 중강 개시 등이 열렸으며, 일본과는 세견선이라 하는 관허의 무역선이 내왕하여 곡물, 목면, 가죽, 인삼 등을 구입하고, 은, 구리, 납, 후추와 그 밖의 남방 물자를 들여 왔다.

교역의 진척에 따라 화폐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화폐는 국초에 조선통보를 비롯하여 저화, 전폐 등을 만들어 썼으나,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곡물과 포목 등이 화폐의 구실을 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이 많았으므로, 왜란 후 이덕형이 구리돈을 만들어 쓰기를 주장하였으나, 구리의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인조 때에 상평통보를 만들어 조금씩 유통시키다가, 중종 때에 이르러 허적의 주장에 따라 마침내 주전도감을 두고, 본격적으로 이를 만들어 널리 통용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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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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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 생활의 진보

민본 정치와 산업의 발달에 따라 흩어졌던 향촌 생활도 생기가 감돌게 되었으며, 각종 상조 조직이 이루어졌다. 특히 향약과 계와 두레가 민중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향약은 권선 징악과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한 향촌의 자치 규약인데, 송대의 여씨 문중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종 때 조광조의 주장으로 일시 실시하다가, 그가 실각한 뒤 중단된 일이 있다.

그 후 이황, 이이 등이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만들어 보급시킴에 따라, 이를 모방한 각종 향약이 널리 퍼졌다 그 조직은 대개 각 읍의 향교나 향청을 중심으로 하여 회장인 도약정, 부회장인 부약정, 간사인 직월 등의 임원을 두어, 향정이나 이장 등이 이를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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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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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는 고려 시대에 생겨 조선의 중엽 이후에 유행하였다. 이에는 종계, 화수계와 같이 친목을 목적으로 한 것, 혼상계, 위친계와 같이 공제를 목적으로 한 것, 동계, 군포계와 같이 공동 부담과 인보 단결을 목적으로 한 것, 동업 조합인 삼계, 우계, 금계, 은계와 같이 동업의 발전을 목적으로 한 것, 산동계와 같이 식리를 목적으로 한 것 등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농촌 중심의 향촌 조직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은 두레였다. 두레는 경기 이남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으로, 협동 노동, 상호 협력, 공동 유락, 상호 규찰 등을 목적으로 하였던 촌락 단위의 조직이었다. 두레마다 깃발이 있었으며, 좌상, 공원 등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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