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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실학 운동과 문화의 새 동향

실학 운동의 기반

서양 문물의 접촉으로 생겨난 세계 의식의 확대와 자아의 각성은 조선 학자들의 학문적 반성을 촉구하는 외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왜란, 호란 후 대두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인 혼란 상태와 그로 말미암아 가중된 민생고는 현실 비판과 현실 타파의 주장이 나오게 된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사화 후 서원을 중심으로 연구되던 주자학이 이황, 이이에 의하여 심오한 철학의 세계로 접어들었으나, 현⋅숙종 때부터 부질없는 대의 명분론에 집착하여 현실과 유리된 공리 공론에 치우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발이 컸으며, 이러한 반발이나 학문적 반성은 곧 실학 성립의 학문적 배경이 되었다.

전통적 주자학 대신에 우리의 현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용 후생의 학문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연구 방법도 종래의 추상적인 추리 대신에 객관적 사실을 실증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구하는 실사구시의 방법을 취하였다.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것이다.

실학의 발생

실학의 선구자는 선조, 광해군 때의 이수광으로, 그는 지봉유설을 지어, 정치, 경제, 천문, 지리, 문자 등을 논하고, 서양의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였다.

또,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지어 우리 나라 지리학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고, 효종 때의 김육은 대동법과 주전의 실시를 역설하고, 서양 역법인 시헌력의 채용에 힘썼다. 이렇게 시작된 실학은 효종, 현종 때의 유형원에 이르러 그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일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구하고, 반계수록 등의 많은 책을 지어, 우리 나라의 각종 제도를 비판하고 이의 개혁을 역설하였다. 또, 박세당은 주자학을 대담하게 비판하고 색경이라는 농학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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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수록
반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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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숙종 때의 이익도 한평생을 양주에 은거하여 학문의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성호사설을 지어 광범한 지식을 남겼고, 안정복, 이가환, 정약용 등의 수많은 학자를 길러 냈다.

실학 운동의 전성

이용 후생, 경세치용, 실사구시를 목적으로 한 실학 운동은 영⋅정조의 시기를 맞이하여 그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역사, 지리의 고증학적 연구에 있어서는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 해동역사를 지은 한치운, 연려실기술로 유명한 이긍익이나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이 유명하다.

실학 운동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이었다. 그는 박학 다식한 경세 치국의 위대한 학자여서 그의 재능은 경사는 물론, 법제, 농정, 수리, 정치, 경제, 의학에까지 미쳐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포함한 여유당전서를 남겨 실학 운동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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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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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농정과 의학에 밝았던 서유구, 성해응이나, 국문 연구에 공을 남긴 신경준, 유희 등도 유명한 실학자였다. 시대는 좀 떨어지나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나 금석학의 대가였던 김정희도 이 흐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북으로 청국을 통하여 선진 청⋅서양 문명을 받아 사회의 폐해를 바로잡으려고 주장하던 북학파도 실학 운동의 흐름을 받은 것으로, 이 학파의 인물로는 홍대용, 홍양호, 박지원, 박제가 등이 대표적이었다.

편찬 사업의 성황

호학의 군주가 계속되고, 실학의 기풍이 울연한 가운데 문화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서의 편찬과 간행 사업이 매우 활발하였다.

영조 때에 동국문헌비고, 속대전, 국조악장, 속오례의, 속병장도설이 편찬되었으며, 정조 때에는 규장각을 배경으로 대전통편, 국조보감, 동문휘고, 무예도보통지, 전운옥편과 추관지, 탁지지 등이 편찬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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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옥편
전운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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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간행 사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활자의 개량 주조도 여러 차례 거듭되었다. 정조 때에 주자된 임진자, 한구자나 생생자는 그러한 노력의 유산이었다.

국어⋅국문학의 발달

자아의 각성을 배경한 실사구시의 학풍은 국어 국문학의 연구열을 조장하였다.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박성원의 정음통석, 황윤석의 자모변이나, 유희의 언문지는 한글 발전에 기여한 바 컸다.

한편, 국문학에 있어서는 초기의 가사 문학에 대하여 사슬시조와 소설 문학의 발달이 있었다. 김천택은 청구영언, 김수장은 해동가요의 시가집을 엮어 후대에 남겼다.

서민적 취미가 존중되는 경향에 따라 소설 문학의 출발을 보았는데, 사회적 모순을 통렬히 비판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그 기원을 이루며, 그 후 사씨남정기, 구운몽 등으로 유명한 김만중에 이르러 자리가 잡혔다. 그 후, 숙향전,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등의 가정 소설 작품, 임경업전, 유충렬전과 같은 군담 소설 작품이나, 장끼전, 별주부전 같은 해학 문학 작품 등이 쏟아져 나왔다. 영⋅정 시대에 나온 국문 소설로는 춘향전이 백미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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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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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과 여류 문인의 진출

이 시대 문화 활동의 한 특색은 종래 천시되고 냉대받던 서민층과 봉건적 유교 도덕에 얽매여 사회적 활동이 깊이 막혔던 여류층에서 재원이 나와 문화 활동을 전개한 점이다.

정조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서민 출신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한 후, 서민 출신 문인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고시언, 천수경 등은 시가집을 엮었고, 그 밖에 이언진, 장혼, 조수삼 등이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가인으로 이름 높은 김천택, 김수장도 역시 서민 출신이었다.

한편, 여류 사회에 있어서는 조선 중기의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등이 유명하였고, 후기에는 혜경궁 홍씨, 정일당 강씨, 의유당 김씨 등이 유명하였다.

여류 사회가 개명함에 따라 언문이라고 천대받아 오던 한글이 여성 사이에 보급되었으며, 이들 사이에서 내방 가사가 엮어져 귀중한 민족 문화 작품으로 전해진다.

미술의 새 경지

그림은 정선, 심사정, 김홍도, 신윤복 등이 나와 독특한 화풍을 나타내었는데, 특히 김홍도는 천재 화가로서 이름이 높아 산수, 인물, 풍속화에 신묘한 솜씨를 보여 주었고, 신윤복은 풍속화에 능하였다. 말기에는 장승업이 유명하여, 국초의 안견과 그 후의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의 3대 화가로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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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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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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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명종과 선조 사이의 양사언과 한호의 뒤를 이어 윤순, 김정희(추사) 등의 명수가 나왔다. 특히 김정희는 고금에 드문 명필이어서, 그의 글씨는 추사체라 하여 널리 국내외에서 칭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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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글씨
김정희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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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사임당은 서화에도 매우 능하였다.

건축에 있어서는 현존하는 유물이 많으나 전대의 수법을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고, 다만 정조 때에 건조된 수원 화성만이 그 구조에 있어 특이하다.

왜란, 호란 이후로 도자기 예술이 몰락하고 다만 나전 공예와 유기 공예가 발달하여 민속 공예를 대표하였다.

민중 오락의 발달

서민적 취미의 민중 오락도 차차 흥하여 한글로 엮어진 소설이 많이 나와 유포되었는데, 그러한 소설의 줄거리를 창극으로 연출하여 서민들이 즐겼다.

창극은 동작을 중심으로 하는 가면극이나 인형극과는 달리 시청각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민중 속에 깊이 파고드는 효과가 있었다.

창극의 각본을 판소리라 하거니와, 판소리는 전라도를 중심한 남도에서 발달되었으며, 광대들이 각지를 순회하면서 흥행하였다.

한편, 속요, 민요도 유행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오늘날에도 전해져 민중들에게 애창되고 있다. 농촌에서는 농악이 유행하였고, 지방에 따라서는 탈춤이 흥행되었으며, 남부 해안 지대 부녀자들은 달 밝은 밤에 강강술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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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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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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